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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l 11. 2021

1980년대에

작별의 의식

  1980년대에 우리들은 사르트르를 읽었다. 지금 책친구들과 만나 함께 읽고 얘기하는 것처럼 그때도 그랬다. 사르트르를 읽고 보봐르를 읽다가 카뮈로 넘어갔던 시절이었다. 사르트르를 읽던 시기는 짧았으나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말], [구토], [벽] 같은 작고 낡은 책들은 이사를 할 때마다 분주한 내 발걸음을 붙잡아 주저앉히곤 했다. 표지를 어루만지고 몇 문단을 읽는 것, 그게 전부였다. 전문을 다시 읽은 기억은 없다(지금은 내용도 기억나지 않고 책들도 사라졌다).


 

   [작별의 의식]에서 사르트르를 다시 만났다. 평소 시몬 드 보부아르는 선이 굵고 거침없는 글을 쓰지만 동시에 정교하고 치밀하게 쓴다라고 여겼으므로 처음 몇 페이지를 읽고 든 생각에 - 그러니까 너무 빠르고 거칠어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맨발로 달려 내려가는 느낌이라 불편하다는 - 자못 놀랐던 걸 고백한다. 문장이 짧고 정제되지 않았으며 균형감도 부족해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의심이 드는 부분마저 있다. 하지만 맞다. 황홀할 만큼 아름답고 서정적인 혹은 실제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냉철하고 적확한 기록은 보부아르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죽음을 향해가는 사르트르의 곁을 지키면서 그가 노쇠해 약해지고 병들어 종내 무너지는 걸 바라본다는 게 어떤 일인지, 그 어둠과 침묵의 깊이를  타인은 가늠할 수가 없다. 누구나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 죽음을 언제나 남의 일로만 여기는 버릇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나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보부아르가 점점 느려지는 사르트르의 걷는 속도에 자신의 그것을 맞추듯 우리도 속도를 맞춘다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걸어온 긴 세월을 나 역시 조금 떨어져 계속 걸었다고 생각하면?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는 사르트르를 지켜보던 십 년 동안 보부아르 역시 그 옆에서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걸, 자신 역시 노화와 소멸의 길을 걸으면서도 다만 내색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는 걸, 무엇보다도 모든 이들이 그 길을 함께 걷고 있다는 걸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보부아르가 쓴 건 말년의 사르트르에 관해서이지만 읽는 이들은 사르트르뿐만 아니라 시몬 드 보부아르도 함께 움직인다는 걸 필연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물론 책장을 넘기고 있는 자신도 책 밖에 멈춰 있을 수만은 없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지는 것,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보부아르가 엄마의 죽음을 지켜보던 경험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쓴 [아주 편안한 죽음]을 나란히 놓아두었다. 몇년 전 [죽음의 춤]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걸 읽었으나 내가 소설에서 구하는 게 서사만은 아니기에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로 다가올 것이다. 그동안 시간이 지났고 많은 일이 있었던 그 만큼 나도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므로. [작별의 의식]을 염두에 두고 읽을 예정이다. 내가 작가와 처음 만났던 [초대받은 여자]는 절판이라 아쉽다. [레 망다랭]이 다시 나왔으니 어쩌면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옛날 학교 앞 복사집에서는 해적판 번역본을 취급했는데 아마 지금은 사라졌을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복사집 문을 열고 들어가 [초대받은 여자] 있어요? 하고 묻는 상상을 해본다. 그 시절 제일 인기 있던 해적판은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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