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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ug 15. 2021

눈의 여왕, 나의 소녀

다시 쓰는 안데르센

   당장 돌아가야 했다. 화산의 분화구를 들여다보던 눈의 여왕은 갑자기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죄어들었다. 잊고 있던 몸의 감각, 졸아드는 심장의 느낌에 여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착각이겠지, 내내 카이 생각만 하고 있으니 제정신이 아닌거야.  도대체 화산의 분화구 같은 것들을 왜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했을까? 라플란드에 카이를 혼자 놔두고 떠나오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분명해!' 


“돌아가야 해!”


  얼음궁전에서는 카이가 풀리지 않는 단어 게임에 열중해 있을 것이었다. 카이, 눈의 여왕은 카이의 이름을 부르다가 다시 한번 소스라쳤다. 자기 안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부드러움이, 메말랐다고 여겼던 온기가 ‘카이’라는 이름에 묻어 입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은밀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 순간 휘날리던 머리카락 몇 올이 녹아내렸다. 불안은 점점 커졌다. 나는 듯 달려 나가는 썰매에서 균형을 잃고 떨어질 뻔할 때마다 주문처럼 자신이 눈의 여왕이라는 걸 떠올렸다. 고삐를 단단히 쥐고 말들에게 속도를 높이라고 외쳤다. 썰매는 쌓인 눈을 뚫고 빠르고 맹렬하게 달렸다. 베일처럼 휘날리는 눈보라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빨리! 더 빨리!”


  눈의 여왕은 소리쳤다. 여왕의 외침은 차가운 눈송이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작은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거나 혼잣말을 하고 걱정하며 염려하는 건 심장이 얼어붙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눈의 여왕이 된 이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바로 앞에서 달리고 있는 말들에게라도 혹시 혼란과 두려움으로 들끓고 있는 마음을 들키지는 않을까 겁이 났다. 눈의 여왕답지 못하다는 사실에 누구에게랄 것 없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썰매를 끄는 흰 말들도 허둥거렸다. 고삐를 잡은 눈의 여왕의 손길에서 초조함과 불안감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말들은 카이가 단어 조각들을 맞추고 있을 얼음궁전의 모퉁이를 돌면서도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썰매가 얼음 포석에 내동댕이쳐지듯 미끄러지면서 가까스로 멈추었을 때 눈의 여왕은 이미 내려 사라진 후였다.

  

날 듯 달려가던 여왕은 성벽 앞에서 멈추었다. 아무리 맹렬히 달려도 떨쳐버릴 수 없었던 불안감의 실체를 맞닥뜨린 순간 눈의 여왕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여왕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토해냈다. 맥이 풀렸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벌어졌으나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포기할 수 있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어쩌면 오래 꿈꾸던 자유를 얻게 될지도 몰랐다.


  얼음 궁전은 허물어지고 있었다. 눈으로 지은 성벽은 군데군데 구멍이 났고 눈이 녹은 물이 흘러내려 성벽 주위의 땅들을 적셨다. 북극의 바람으로 만든 창문들은 창살이 휘어져 뒤틀렸다. 바람에 휩쓸려온 눈으로 만든 그 방들! 오로라의 불꽃으로 환하고 얼음장처럼 춥고 화려한 큰 방들은 더 이상 춥지 않았으며 오로라도 사라졌다. 드넓고 텅 빈 눈의 방 한가운데 꽁꽁 얼어붙어 있어야 할 호수에 다다랐을 때 눈의 여왕은 화산의 분화구에서 느꼈던 예감이 정확하게 들어맞은 걸 알아차렸다. 눈의 여왕이 집에 있을 때 앉아 있곤 했던 호수가 녹고 있었다. 얼음조각들이 호수 위를 유영하듯 떠다녔다. 눈의 여왕이 이 세상에서 최고의 물건이라고 칭했던 ‘이성의 거울’이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카이는 없었다. 눈의 여왕의 눈에 들어온 건 단어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카이의 모습이 아니라 ‘영원’이라고 맞춰져 있는 유리조각 들이었다. 눈의 여왕은 약속했었다.


“그 단어를 알아맞히면 너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어. 그럼 내가 너한테 이 세상을 주겠다. 그리고 스케이트 한 벌도 새로 주지.”


  카이가 앉아 있던 곳에서는 미세한 장미 향기가 감돌았다. 눈의 여왕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눈의 여왕은 카이가 남기고 간 유리조각들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카이가 언젠가 그 단어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애써 외면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낱말 조각에 닿은 손가락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눈의 여왕은 말수가 적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던 소녀였다. 부모를 잃었을 때 울지 않는 소녀를 보고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말하곤 했다.


“아마 심장이 없는 모양이야”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소녀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울기 시작하면, 둑을 넘은 강물처럼 거센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까 봐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옆집에 사는 소년이 곁에 있어주었다. 소녀가 침묵하면 소년도 말을 하지 않았다. 둘은 나란히 마을 저편을 바라보며 앉아있곤 했다. 소녀는 말 같은 건 딱히 필요 없었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소년이 함께 있어 다른 모든 것이 시시했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불안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느 날 소년이 소녀에게 신문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신문에는 용모 단정한 젊은 남자는 누구나 궁정으로 와서 공주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중 최고로 말을 잘하는 사람, 그리고 궁정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을 공주가 남편으로 고를 거라는 내용이 나와 있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가보고 싶다고 말했고 소녀는 가지 말라는 말을 삼켰다. 소녀의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뒤로 하고 소년은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소녀는 여러 날을 소년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앉아있곤 했다.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졌다. 어느 아침에, 심장을 찌르는 듯 날카로운 아픔에 잠에서 깨어난 소녀는 이제 자신이 소년을 그리워하거나 기다리지 않을 거라는 걸, 얼음보다 더 차가운 마음이 자신이 가진 힘의 전부라는 걸 알았다. 거울 속의 자신은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진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이었다. 그때는 심장에 호브고블린의 거울 조각이 박혀버린 사실 따위는 알 리가 없었다. 소녀는 그렇게 눈의 여왕이 되었다.


  눈의 여왕은 아름답고 차가웠다. 눈의 여왕과의 입맞춤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모든 것을, 사랑했던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한순간에 잊게 만들었다. 눈의 여왕은 구름 위를 날아올라 대지와 바다 위를 날았다. 여왕이 눈 위를 미끄러지듯 날아가면 그 아래로 바람이 휘몰아치고 늑대가 울부짖고 흑 까마귀가 비명을 질러댔다. 달은 크고 환하게 빛나면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눈의 여왕은 꿈을 꾸었다. 낯설고 불쾌하고 위험한 감각들로 이어진 꿈들은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소녀였을 때에도 이미 마음을 감출 줄 알았던 눈의 여왕은 소년을 기다리던 마음을 고스란히 숨겨놓았는데 스스로도 잊고 지내던 그 마음이 가끔 되살아나 꿈속으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기억이 마음을 휘저어놓을 때마다 그녀는 북극으로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썰매와 절대 지치지 않는 말들이 있었으나 조바심이 났다. 꿈은 꿈일 뿐이라고 중얼거려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카이를 처음 보았을 때 눈의 여왕은 고통스러웠다. 어린 시절의 친구, 떠나버린 소년이 돌아온 것 같았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미래였다. 부드러운 살과 따뜻한 피를 가진, 온전한 카이에게 다가가는 건 위험했다, 카이의 숨결이 베일에라도 닿으면 바로 녹기 시작할 것이었다. 게다가 카이 옆에는 평화와 고요로 빛나는 눈을 가진 게르다가 – 어린 시절의 자신과 닮은 – 있었다. 얼음심장을 가졌어도 카이를 잊는 건 불가능했다. 카이를 곁에 두기 위해선 카이의 심장을 얼게 해야했다. 그건 쉬웠다. 이제 거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여왕으로서는 거울 조각을 한 귀퉁이 나눠주면 될 일이었으니까. 눈의 여왕이 공원에서 놀고 있는 카이에게 다가갔을 때는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고 또한 들여다보느라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샌 후였다.



  눈의 여왕은 쓰러져 엎드린 채 눈물을 흘렸다. 부모를 잃었을 때 미처 흘리지 못한 눈물이었다. 소년이 떠났을 때, 소년이 공주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흘리지 못한 눈물이기도 했다. 눈물은 성벽을 녹이고 창틀을 허물어뜨렸다. 베일과 썰매도 녹아내렸다. 뜨거운 눈물 덕분에 몸에 온기가 돌자 눈의 여왕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얼음궁전이 있던 자리는 너른 들판이었다. 오랜 세월 얼어있었던 땅이 녹자 그동안 잠들어 있던 나무들과 씨앗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두툼한 나무껍질을 뚫고 어린 새순들이 돋아났다. 꽃들은 싹을 틔우고 서둘러 꽃봉오리를 부풀렸다. 바람은 향기를 퍼뜨리며 들판을 휘돌아나갔다가 돌아와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꽃그늘 아래서 잠들어있던 눈의 여왕이 눈을 뜨고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나무둥치에 몸을 기대고 가까스로 앉은 눈의 여왕은 메마르고 주름진 손등을 바라보았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세월이 새겨진 손등이었다. 눈의 여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궁정의 차갑고 호화로운 텅 빈 방들에서 지냈던 시절은 나쁜 꿈같았다. 눈의 여왕이 시간마저 얼려버려 모든 걸 멈추게 했던 동안에도 계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고 갔다. 눈의 여왕은 세월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은 게 마음에 들었다.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따뜻하고 아름다운 여름날 저녁이었다. 눈의 여왕은 오래전에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황혼에 창백한 초승달을 보았지

딱 한 번 보았던 소녀의 눈썹이었네”*






[눈의 여왕]을 처음 읽었을 때 나도 어린 소녀였습니다. 책을 읽으면 뭐라도 생각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그때는 있었습니다. 독후감에 눈의 여왕이 불쌍하다고 썼다가 그 이유를 묻는 선생님 앞에서 쩔쩔 맸던 기억이 납니다. 나도 게르다를 쓸 걸! 그때는 그랬지요. 그 생각이 나서 썼습니다. 동화 속 캐릭터지만 평안하기를!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의 하이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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