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탁을 치우면서 차를 마시고 싶어졌다. 햇살 때문이었을 것이다. 커튼이 없는 창으로 봄볕이 여과 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찻주전자에 넉넉히 담은 찻잎 위로 끓인 물을 부을 때 솟구쳐올라오는 향기에 눈을 감는다. 문을 열어 봄볕을 들인다. 엎어놓았던 책을 다시 들었으나 도통 읽히지 않는다. 옆에 놓인 찻잔에서 연신 흘러나오는 향기 때문이었다. 한여름 햇살에 농익은 토마토 냄새다. 향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찻잔에서 솟아 나오는 건 여름 오후다. 마을은 조는 듯 고요하고 가끔 개 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수다스러운 새들도 낮잠에 빠진 듯 조용한 마당으로 난 문을 열고 뜨겁게 달아오른 슬리퍼에 맨발을 밀어 넣는 즐거움. 혹은 금방이라도 땅에 닿을 것처럼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은 날 코끝에 느껴지던 비릿한 흙내음,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땀에 젖은 옷자락을 희롱하면 마당 한 귀퉁이에서 익어가던 크고 작은 토마토 열매의 붉은 빛. 조용할수록 더해지는 불안, 금방이라도 깨트려질 것 같은 평온, 어느 나뭇가지에서 지빠귀라도 날아오르면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푸른 그늘이 있다. 마르셀에게 보리수 차에 적신 마들렌이 있다면 내게는 여름의 정수가 담긴 차가 있다.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마르셀이 레오니 아주머니의 방을 떠올릴 때마다 매혹당하는 건 '은밀하고도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방에 '넘쳐흐르는, 온갖 삶이 발산하는 무수한 냄새'들이었다. 오늘 나를 매혹시킨 것도 바로 '냄새'들이다. 찻잔을 들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입안에 머금을 때마다 농익은 토마토 냄새가 났다. 토마토 껍질을 벗길 때마다 미끄러지던 손가락과 고인 토마토 즙 위에 떠있던 허브 이파리들, 빨갛고 까만 후추 알갱이들이 차례로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그건 금방 딴 토마토 냄새인 동시에 냄비 속에서 여러 시간 달여져 농축된 토마토소스의 냄새이기도 했고, 끓고 있는 토마토를 젓는 나무주걱처럼 '한가로우면서 규칙적인' 냄새이기도 했다. 싱크대에 펼쳐진 요리책과 냄비 사이를 무심한 듯 오가면서도 분명히 '질서 있는 냄새'였고, 열려 있는 창문처럼 '태평하면서도' 주방 벽에 걸려있는 타이머처럼 '용의주도한 냄새'였다. 볕에 바짝 마른 행주 냄새, 저물녘의 냄새, 가족들을 기다리는 냄새였던 그것들은 '그곳에 살지 않고 스쳐가는 사람들에게는 시(時)의 커다란 보고로 사용되는 산문적인' 냄새였다. 찻잔은 비었으나 향기는 남았다. 언제나 보이는 것보다는 숨겨진 것들이 많다는 걸 잊지 말라는 신호다.
이제 곧 다가올 봄날에 토마토를 심으면 나는 얼마나 자주 오늘 마신 차 한 잔을 떠올리게 될까? 곁순을 따고 휘어진 줄기를 묶으며 꽃송이를 헤아릴 때마다 차를 우리던 아침으로 되돌아올까? 어쩌면 토마토 이야기를 쓰고 있는 지금으로 돌아올까? 아니 그보다 더 멀리, 여름 볕에 달아오른 툇마루에 앉아 토마토를 썰고 있던 어린 내게로, 할머니가 나를 보고 착한 아이라고 불렀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