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Mar 24. 2022

숲에는 나무들만 사는 게 아니다

개와 고양이가 있는 풍경

   늦은 봄부터 이른 가을까지는 창문을 한 뼘 정도 밀어 올리고 지낸다. 열린 창으로 바람과 빗소리가 들어온다. 빗소리는 여름밤의 자장가다. 고양이들은 싸우기도 하는 모양이고 막다른 골목인 줄 모르고 집 앞까지 들어온 산책객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도 우물우물 들린다. 그러나 여름에는 무엇보다 이른 아침의 새소리다. 희붐한 새벽빛이 퍼져나가면 꾀꼬리가 숲을 깨운다. 순식간에 사방은 새소리로 가득하다. 휘파람을 불듯이 긴 울음을 우는 새, 웃는 듯 우는 새(아, 어쩌면 정말 웃는지도), 정확하게 박자를 맞추는 새, 차오르는 행복에 어쩔 줄 모르는 새, 높은 음색으로 모든 울음을 눌러버리는 새, 한바탕 소란이 잦아들면 숲은 다시 조용해진다. 방금 전의 소란이 꿈인 듯 무색하다. 새벽 공기는 여름에도 서늘해서 모로 누운 나는 이불을 끌어올리고 무릎을 구부려 몸을 작게 만든다. 고치 속에서 몸이 자라기를 기다리는 애벌레처럼 새들이 다시 울고 개와 고양이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새벽마다 오늘은 숲에 가보자는 생각을 하지만 아침에는 벌써 잊는다. 휘파람을 불듯이 다시 새가 운다. 방금 눈을 뜬 것처럼 새삼스럽게 창밖을 바라본다.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이하는 게 좋다. 맑은 여름날 아침이면 나뭇가지 끄트머리에 새로 돋아난 어린잎들이 투명하게 빛난다. 그늘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에 묻혀서 고요하고 적막한데 어쩌다 나무 우듬지 높은 곳에서부터 가느다란 햇살이 내려와 나무둥치에까지 닿으면 그곳만 불이 켜진 것처럼 노랗고 밝게 빛난다. 마침 바람이 지나느라 작은 소동이 일면 햇빛과 그늘이 일렁거린다. 그건 숲이 내게 보내는 신호,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왜 망설이는 걸까.     


둔둔이


  크대 앞에 서면 마당 오른쪽과 데크로 올라오는 계단이 시야에 들어온다. 음식을 만들거나 설거지를 하면서도 시선은 반쯤 마당을 향해 있다. 밥 먹으러 오는 고양이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에 익숙해진지 꽤 되었다. 어느 날 그 계단으로 낯선 동물이 올라왔다. 검은색과 갈색이 섞인 몸, 곰인형처럼 생긴 귀가 보였다. 느릿한 몸놀림이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순간 오래전 집을 나간 내 강아지, 모로가 모습을 바꿔 돌아왔나 싶었다(모로는 저녁 준비를 할 시간이 되면 산으로 향하는 문으로 나가서 근처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걸 오후 일과로 삼았는데 어느 날 숲으로 들어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마당에 있던 남편을 부르려 문을 열자 곰인지 강아지인지 모를 그 작은 동물은 숲으로 사라졌다. 남편은 뒷모습만 봤다고 했다. 서두르지 않고 털레털레 걸어서 예전에 내가 모로, 하늘이, 바람이와 산책 다니던 산길을 올라갔다고 했다. 그게 몇 달 전이었다.     

   곰인형을 닮은 강아지가 다녀간 후 며칠 동안 멍하니 지냈다. 망설임도, 불안과 의심도 섞이지 않은 눈빛으로 익숙하게 계단을 오르는 모습은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던 모로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돌아가는 뒷모습도 겁에 질리거나 서두르는 품새와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 아이가 다시 돌아왔으면 싶었다. 모로가 아니어도 좋았다. 돌아갈 집이 없다면 여기서 살아도 좋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은근히 상상하기도 했다. 나랑 눈을 마주치고도 놀라지 않다니, 우리 어디에서 만난 적이 있던 거니? 내가 물으면 앞발을 내미는 녀석의 모습을 꿈꿨다. 자기 집인 양 먹고 자던 고양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때처럼 맥 빠진 며칠을 보냈다.     



가끔은 고양이들이 이 곳의 주인 같기도 하다.

   

  고양이들은 오고 간다. 밥만 먹고 사라지던 처음에는 고양이도 우리도 조심스러웠다. 다가가면 숨어버리는 통에 시야에는 흔들리는 꼬리만 남았다. 언제부턴가 밥을 먹고 나서도 바로 돌아가지 않고 발밑에 와서 눕더니 긴 꼬리로 내 다리를 말기도 했다. 조금씩 얘기를 나눴다. 보이지 않다가 며칠 만에 나타나면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느냐 따지기도 했다. 고양이들은 아기 고양이들을 낳았고 그 고양이들이 또 어미가 되었다. 유난히 약한 아이가 있으면 집안으로 들여와 재우고 먹여 제법 고양이다운 느낌이 날 때까지 함께 지냈다. 마당에 나가면 고양이들이 옆에 와서 뒹굴거나 한 뼘 거리에 앉아 있곤 했다. 문밖에 정물처럼 앉아 집안의 우리를 지켜보는 고양이들 탓에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비 내리는 날이 반갑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도 고양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떠났다. 동네를 지나다가 마주치는 고양이들에게 왜 안 오느냐고 물으면 작은 목소리로 야옹거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차츰 우리들은 고양이들이란 으레 그렇거니 하게 되었다.      

하늘이와 바람이

   

  몇몇 고양이들은 이름도 가졌다. 감자와 도토리는 요즘 제일 많이 부르는 이름이다. 이름이란 게 얼마나 힘이 센가를 감자와 도토리 덕에 다시 알게 되었다. 누가 감자라고 말하면 찌거나 볶는 식재료보다 꼬리에 하얀 줄무늬가 선명한 착하고 순한 고양이가 떠오르고 도토리라는 단어를 보면 늦가을 아침 주차장에 떨어져 있던 작고 반들반들한 열매보다 입 주위가 하얗고 목소리가 크고 감정표현이 풍부한 작은 고양이가 먼저 생각나는 것이다. 그런데 도토리가 사라졌다. 아침이면 거실 문 앞에서 누구라도 나오기를 기다리고, 무릎 위에 올라오기를 좋아하며, 오징어를 좋아하던 꼬맹이 도토리가 사라졌다. 다른 고양이들이 더 좋은 곳을 찾아 떠나긴 해도 도토리는 남을 거라고 했던 우리들은 작은 혼란에 빠졌다. 난 날이 너무 더워서 산으로 피서를 갔을 거라고 했다. 도토리에게 이름을 지어줬던 딸애는 산으로 간 고양이들은 잘 안 오더라고, 그래서 산이 점점 싫어진다고 고개를 저었다.     

   모자를 쓰고 장화를 신었다. 오랜만에 숲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집 옆으로 난 좁은 수로를 넘었다. 무성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내려온 햇살이 내려앉아 마치 불을 밝힌 것처럼 노랗고 밝게 빛나는, 아침마다 창밖으로 바라보는 장소에 서보고 싶었다. 경사면을 오르는데 발이 푹푹 빠진다. 쌓인 낙엽들이 흙으로 변해가는 중일까? 유난히 검고 폭신한 흙이 모인 곳은 산벚나무나 층층나무의 이파리들이 떨어져 쌓인 곳일 것이다. 솜씨 좋은 장인이 짠 두꺼운 양탄자 위를 걷는 기분으로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아래 잠시 섰다. 손바닥 같은 잎들이 모여 만든 그늘,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 드는 햇살, 언뜻 보이는 하늘, 아랫동네, 윗집, 그리고 나의 창문이 보인다. 가끔씩 내려오는 고라니, 길을 잃은 개나 길고양이들, 어딘가로 가고 있었을 모로, 그리고 인형을 닮은 강아지, 꼬맹이 도토리도 나처럼 그 자리에 잠시 멈췄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내가 반쯤 열어둔 창문을 보았을 것이다. 쏟아지는 빛 아래에서 무대에 처음 선 배우가 관객들의 시선에 압도당해 고통스러운 독백을 시작하기 직전의 침묵과 싸웠듯이 망설이고 머뭇거렸을 게 분명하다.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었을 것이다. 의심과 불안을 떨치고 구름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빛을 망토처럼 두르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을 것이다.      

   돌아가라는 듯이 나무 사이를 휘돌아 나가는 바람에 나뭇잎 몇 장이 춤추듯 떨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관목과 키 큰 풀들이 산을 거슬러 올라오는 바람에 흔들렸다. 숲에는 나무들만 사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 곁에는 감자와 감자의 아기 고양이들이 있습니다. 추운 밤이면 찾아오는 하얀 고양이, 다치고 병이 날 때마다 찾아와 며칠씩 지내고 조금이라도 몸이 회복되면 미련없이 떠나버리는 회색 고양이도 이제는 낯을 가리지 않아요. 고양이 밥을 채워 놓으면 새들도 좋아합니다. 흩어진 사료를 쪼아 먹고 그릇 가운데로 곱게 모아두고 가는 예절바른 새도 있습니다. 곧 매화가 벙그러지고 찔레꽃이 피기 시작하면 꿀벌과 나비들도 찾아오겠지요.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음에 가슴이 먹먹하도록 감사합니다.


이전 11화 친구의 유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