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저녁을 먹고 방에 올라와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깻잎 냄새가 났다. 책상과 침대가 전부인 작은 방에서 깻잎 냄새가 날 리 없었다. 냄새는 내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다녔다. 의자에서 일어나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걸어가면, 고여 있던 공기가 출렁이면서 깻잎 냄새가 퍼졌다. 이상하다 깻잎 냄새라니, 코를 킁킁거리다가 아하! 오후에 마당 이곳저곳에서 자라고 있는 들깨를 뽑았잖아. 그때 그 냄새가 옷에 묻어온 듯했다.
들깨는 마당 곳곳에서 자랐다. 작약 그늘 아래에 숨어 있는가 하면, 블루베리 가지 사이애서도, 쪽파를 심어놓은 고무 화분에도, 목련 아래에서도 자랐다. 장마가 곧 시작인데 그대로 놓아두면 작은 나무처럼 커져서 뽑아내려면 만만치 않은 품이 들 테고 들깻잎 또한 너무 세어져서 먹지도 못할 게 뻔했으므로 이쯤 해서 갈무리를 할 요량이었다. 들깨들은 벌써 대가 굵어져서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제법 힘을 주어 당겨야 했다. 꿈쩍도 안 하던 들깨가 조금씩 움직이다가 겨우 뽑히면 검고 포슬한 흙알갱이들과 함께 특유의 알싸한 향기가 딸려 나왔다. 향기는 땅 깊은 곳에서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폭죽처럼 터졌다. 몇 시간이 지난 후에도 방을 채운 깻잎 냄새는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깻잎 냄새를 한껏 들이마셨다.
들깨를 부러 심은 건 아니었다. 아니 심은 적이 있기는 했다.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와서 처음 맞이했던 봄에 한두 포기를 심었을 것이다. 상추며 오이, 토마토 등을 심을 때 말이다. 들깨는 특별히 손이 가는 채소가 아니었다. 홀로 잘 자랐고 오래 살다가 가을 첫서리를 맞고서야 시들었다. 언제까지나 서슬이 퍼럴 것 같았던 들깨는 서리가 내린 날이면 하룻밤 새 쪼그라들고 늘어져서 검게 변해버렸다. 그렇다 해도 이듬해 봄이면 수없이 많은 새싹이 돋았다. 해마다 채소 모종을 사다 심었지만 들깨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들깨는 바람에 날릴 만큼 가벼웠던지 제 살던 곳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 능청스럽게 싹을 틔우곤 했기에 마당은 온통 들깨였다. 깻잎이 손바닥 반 정도의 크기로 자라면 먹을 수 있었다. 보드라운 깻순을 꺾어 데쳐서 볶고, 상추와 함께 쌈을 싸고 부추와 섞어 전을 부쳤다. 깻잎 김치를 담고 깻잎 장아찌가 익어가는 동안 장마가 지나가고 깨송이가 생기고 작고 하얀 꽃이 피었다가 졌다. 가을에 바싹 마른 깨송이를 손으로 비비면 안에서 반짝이는 들깨와 함께 피어나던 마법의 향기.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느닷없이 깻잎 장아찌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렸을 때 엄마의 부엌에서 났던 냄새였다.
다음날 깻순을 다듬었다. 물이 끓을 때 소금 한 줌을 넣고 깻순을 데쳤다. 끓는 물속에서 깻잎들은 금세 풀이 죽었다. 순해진 깻잎들을 찬물로 두어 번 헹구어 짰다. 주먹 속에서 타원형으로 둥그렇게 뭉쳐진 깻잎을 한 장씩 떼어내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뇌 속의 기억 중추도 이런 모양이 아닐까 싶었다. 뇌 속에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지경이어도 삶은 계속되므로. 어느 날 뉴스 화면에서 본 출근길 전철 풍경처럼 비좁은 공간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가 발은 허공에 뜨고 내 팔이 다른 사람의 어깨에 붙어있는 것처럼 비틀려 엉켜버린 모습이 손 안의 데친 깻잎 덩어리에 겹쳐졌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어느 날, 그러니까 우리들의 뇌가 꽉 차버려 더 이상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되면 그때부터는 오래된 기억을 하나씩 불러내 정리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게 보통사람의 삶이 아닐까. 뭉쳐진 깻잎을 한 장 한 장 떼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오래 전의 사람과 사물들을 다시 불러내는 일. 할머니에게서 듣는 옛이야기가 그렇게 재미났던 까닭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깻순을 데친 물은 갈빛, 초록을 빼앗긴 가을의 색과 닮았다. 오래된 기억만으로 살아가는 이의 뇌 역시 깻잎 데친 물처럼 누르스름한 빛일지도 모르겠다. 기름을 두르고 마늘과 양파를 볶아 향이 올라올 때 고불고불한 깻잎을 넣고 볶았다. 간을 해서 볶다가 대파와 붉은 고추를 썰어 넣고 물을 조금 부은 후 뚜껑을 덮고 뭉근하게 익혔다. 오 분 정도 지났을 때 뚜껑을 열면 깻잎은 부드럽게 부풀어 있다. 들깨가루와 들기름을 넣고 섞으면 완성이다. 반찬통에 옮기다가 한 젓가락 들어 맛을 본다. 오래된 새로운 맛, 엄마의 깻순 볶음과 닮은 듯 다른 맛이다.
엄마는 다소 호사스러운 주전부리로 부각을 만들기도 했다, 찹쌀풀을 쑤어 깻잎에 바른 후 색색으로 물들인 깨를 뿌리고 한지에 얹어 말렸다. 엄마가 깻잎에 풀을 바르고 깨를 올려놓으면 그것들이 온전히 마를 때까지 지키는 건 내 일이었다. 부엌 문지방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햇볕이 쏟아지는 마당과 말라가는 깻잎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달그락 소리가 날 정도로 바싹 마른 부각은 부엌 어둑한 곳에 숨겨져 있다가 기름에 튀겨져서 바구니에 담겼다. 한 입 베어 물면 입안에서 와사삭 향기가 부서졌다. 그 감각을 잊지 않은 탓에 요즘에도 부각을 먹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된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맛과 냄새를 찾아보고 싶어서일까. 스스로 깻잎 부각을 만들어본 적은 없다. 모래알처럼 작지만 단단한 기억을 온전히 간직하고 싶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돌아갈 곳을 숨겨두는 방랑자처럼.
깻일 장아찌를 만들던 날
맛과 냄새는 시원을 알 수 없는 강물처럼 먼 곳에서 온다. 깊은 동굴처럼 어두운 곳에서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을 여행이다. 간장에 절인 깻잎의 짭조름한 맛과 하얗게 부푼 깻잎 부각의 초록색 향기는 가장 먼 곳의 기억이다. 그리하여 단 한 장의 깻잎에서 유년의 세계가 다시 살아난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하게 돌아와 나를 둘러싼다. 해마다 돋아나는 들깨의 싹은 내가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봄의 영혼이자 지금의 나를 유년의 나와 연결해 주는 묘약이다. 분리되었던 나는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가는 마당에서 익숙한 향기로 나 자신과 하나가 된다.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한 후 얼마나 많은 꽃들을 심었는지 모른다. 농원 앞에 나와 있는 모종들을 그냥 두고 지나칠 수 없어 온갖 모종들을 사서 심었다. 수확은 시원찮았고 그나마 시기를 놓쳐 먹지 못한 게 많았다. 그래도 모종 심기를 거르지 않았는데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내가 해마다 마당에 심었던 꽃과 나무가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의 마당에 살고 있던 꽃과 나무였음을, 엄마가 집 앞 텃밭에서 가꾸던 채소들이었음을 말이다. 봄마다 씨앗과 모종을 늘어놓고 분주히 오갔던 건 내 나름의 기억법이었다. 싹을 틔우는 일은 지나간 시간이 지금과 이야기를 나누는 한 방법이었다. 땅을 일구고 물을 뿌리고 곁순을 지르고 헛꽃을 따다 보면 이해할 수 없었던 일도, 분하고 억울했던 일도 ‘그럴 수 있는 일’이 되었다. 기억은 꽃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열매도 가져다주었다. 작고 단단한 기쁨들이었다. 씨앗과 모종을 고르고 살피는 일은 다름 아닌 나를 보살피는 일, 내 안의 세계를 정돈하는 일이었다. 말끔하게 정리했다고 여겼던 마당의 들깨가 아직 보인다. 남김없이 뽑아버리지 않아 다행이다. 내년에도 들깨 싹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여기저기서 새순을 만나는 건 또 얼마나 반가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