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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y 27. 2024

다름의 미학

[월간 에세이] 6월호에 발표했습니다.

                                    

  거실 벽난로 주변이 훤해 보인다. 며칠 새 화분 몇 개가 또 나갔다. 마당에는 봄기운이 돌지만 실내에서 겨울을 난 식물들은 조금 더 머물러야 한다. 봄이 왔나 싶어 내놓았다가 꽃샘추위에 된통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마음 놓고 마당에 화분들을 내놓으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하는데 식물들이 그때까지 버텨 줄지 걱정이다. 조바심에 나 역시 온몸이 간질간질하다.


  가을이 깊어지면 아침마다 최저온도를 확인한다. 정원에서 겨울을 날 수 없는 식물들을 서리가 내리기 전에 실내로 옮겨야 해서다. 겨울 거실은 춥지는 않아도 햇볕과 바람이 부족하고 건조해서 식물들에게는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없다. 그걸 아는 만큼 하루라도 늦게 들여놓고 싶다.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티다가 아이쿠 이제는 안 되겠군, 이란 생각이 들 때야 식물들의 이사가 시작된다.

     

  실내로 들어온 식물들은 갑자기 온화해진 환경에 몸살을 한다. 유칼립투스 중 일부는 이른 봄이 온 줄로 착각을 해서 손톱만 한 새잎들을 달기도 한다. 몸살로 잎을 떨어뜨리는 식물과 어린잎들이 돋아나는 식물들 사이에서 남편과 나는 혼란에 빠진다. 남편은 겨울을 나려고 들어왔으니 겨울잠을 자도록 해줘야 한다며 물을 평소보다 적게 줘야 한다고, 까딱 잘못하면 과습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격정이지만 나는 새싹이 나오는 걸 보지 못했느냐고 몰아세운다. 추운 정원에서 따뜻한 실내로 들어왔으니 봄이 온 줄 알고 새잎을 내는 중인데 당연히 물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화분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서 나무들을 살피지만 나는 멀찌감치 바라만 봐도 물이 필요한 아이들을 알아본다. 유칼립투스 가지를 건드리거나 로즈메리 덤불을 더듬으며 냄새 맡기를 좋아하는데 그때 나뭇잎 부딪는 소리가 평소와 다르거나 잎이 얇아진 느낌이 들면 역시 물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건강했던 식물들도 2 월에 접어들면 힘든 티를 내기 시작한다. 작은 화분들 중에는 죽어버린 것들도 있다. 세탁실 밖 데크에는 그렇게 겨울을 이기지 못한 화분들이 조금씩 늘어난다.     

 

  어린 유칼립투스가 몇 개나 죽은 이유로 나는 물 부족을, 남편은 과습을 꼽았다. 진단이 다르니 처방도 달라 나는 물을 더 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남편은 주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린다. 물주기는 보통 남편이 하지만 가끔은 나도 물 조리개를 든다. 대부분 실패한다. 내가 물 조리개만 들어도 남편이 기겁을 하고 가로채기 때문이다. 그는 입으로는 물 조리개는 무거우니까,라고 너스레를 떨지만 실제로는 ‘어림없지, 지금 물을 주면 더 안 좋아진다고. 물을 언제 줘야 하는지는 내가 더 잘 안다고’,라고 하는 걸 내가 모를 리 없다. 이사 온 첫 해부터 함께 살아온 올리브나무도 잘 알 것이다. 겨우내 컵에 담긴 물을 나눠 마신 치자나무가 우리끼리만 아는 웃음을 웃는다.    

  

  그렇다. 마당과 식물에 관한 한 나와 남편의 의견이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겨우내 수국을 감쌌던 낙엽과 상자들을 언제 걷어낼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씨앗은 언제 뿌릴 것이며 모종은 화분에 심을지 화단에 심을지, 화분에 심을 거면 어떤 화분에 심을지, 모종 사이 간격은 얼마나 띄울지 내내 투닥일 것이다. 계절은 바뀌어도 다툼이 그칠 일은 없다. 마당은 끊임없이 자라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싹이 튼 새싹을 언제 얼마나 솎아낼 것인지, 고추와 토마토의 곁순을 얼마나 지를 것인지, 목련은 언제쯤 가지치기를 할 것인지, 점점 꽃이 작아지는 구근들을 그대로 놔둘 건지, 잎만 무성하고 꽃은 빈약한 추명국은 어떻게 할 건지 등 결정할 것들은 매일 생겨나고 마당은 좁아진다. 촘촘하게 붙어 자라는 통에 작고 왜소하게 자라는 식물들은 남편 탓, 정글처럼 무성하고 제멋대로인 식물들은 내 탓, 따져보니 좀처럼 의견 일치를 보기가 어려운 게 마당에 관해서만은 아니었다.     


 두통이 생기면 나는 약을 찾지만 남편은 참는다.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 서비스 신청을 하려 들면 전원을 끄고 좀 쉬게 놔두라고 한다(물론 컴퓨터를). 온수가 안 나올 때 나는 보일러회사 전화번호를 찾느라 분주하지만 남편은 일단 좀 기다려보자고 한다(실제 해결된 적도 있다). 피곤하면 영양제를 챙기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일찍 잠자리에 든다. 턱선이 내려앉고 눈가에 주름이 생겼다고 투덜거리니 나이 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게 아니겠느냐 한다. 이제부터는 늙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거다. 여태 식물을 기르는 문제에 관해서만 생각이 다르다고 느꼈던 건 착각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일상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이토록 다른 사람과 한 집에서 잘도 살아왔구나 싶다.      


  마당에는 곧 새싹들이 오밀조밀 올라올 것이다. 마당을 반으로 나누어 ‘이쪽은 내가, 저쪽은 네가’ 맡기로 하지 않는 이상 언제나처럼 티격태격하다가 등을 돌려버릴 날들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 다름이 우리가 함께 살아온 힘이 아닐까?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가게 마련이라는 남자와 제대로 살지 못하면 살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는 여자가 함께 있기에 마당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아닐까? 올봄에는 솎아낸 새싹들을 모종삽에 올려놓고 어디 심을 곳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얼마나 자주 보게 될까?     





{월간 에세이] 6월호에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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