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시간에 늦은 친구가 이유를 말해줬다.
"준비하고 나오다가 갑자기 어수선한 주방이 눈에 들어왔어. 오늘 아침이 조금 늦었거든. 오후에 돌아가서 치워도 되는 건데 갑자기 집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면 식구들은 내 마지막을 어수선한 주방 풍경으로 기억하겠구나 싶었지. 도저히 그대로는 못 나오겠더라."
신발을 신다 말고 다시 들어가 주방을 정리하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화장대 생각이 났다고 했다. 결국 화장대도 살펴보고 욕실도 들여다보고 집안을 한 바퀴 돌며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대충 치우고 나오느라 늦었다는 거였다. 친구가 뒷모습에 신경 쓰기 시작한 건 두어 해 전에 시어머니의 이사를 거들던 때부터였다.
시어머니가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어 불편한 주택을 떠나 아파트로 옮기기로 했는데 그 이사가 그렇게 어려웠던가 보았다.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이삿짐을 옮기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 전부가 파헤쳐지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평소 시가에 갈 때마다 서늘한 기운이 돌 정도로 정돈된 살림에 감탄하곤 했다는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집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시어머니 본인도 숨겨져 있던 살림살이가 그렇게 많을 줄 몰랐기에 짐정리는 끝날 듯 이어지는 사슬같았다고 했다. 이삿짐보다 훨씬 많은 짐을 버리느라 예정보다 늦게 이사를 끝낸 시어머니가 얼마나 홀가분해 보이던지 부러워졌고 그때부터 틈틈이 물건 정리를 한다는 얘기였다.
내가 옷장 문을 열어젖힌 건 그 며칠 후였다. 별러오던 옷정리를 할 참이었다. 서랍을 하나씩 열 때마다 옆에 옷들이 쌓였다. 몇 해가 지나가도록 한 번도 안 입은 옷, 계절이 바뀌어 옷을 찾을 때마다 아, 이게 여기 있었네 하면서도 정작 입어볼 생각이 들지 않았던 옷들을 한쪽에 쌓았다. 이렇게 간단한 걸 그동안 왜 끌어안고 살았을까? 골라낸 옷들을 의류 수거함에 넣어버리면 끝이었다. 아니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실패였다. 나는 쓸모없음으로 분류한 옷들 사이에 주저앉은 채 어쩔 줄 몰랐다. 버려질 옷들이 왜냐고 묻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잊고 있던 질문들이 - 그러니까 이 옷은 언제 샀는지, 이런 걸 어떻게 입겠다고 산 건지, 옷들이 과연 나의 몸짓을 간직하고 있을지 - 다시 나타났다. 처음의 기세가 사라지자 나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망설이는 사람일 뿐이었다.
마지막까지 버릴 수 없는 옷들이 있었다. 망설이고 고민하다가 다시 집어든 옷들이었다. 다시 입을 것도, 다른 무언가를 만들 것도 아니었다. 버릴 수 없을 뿐이었다. 옷무더기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것들은 단순히 오래된 옷이 아니라 지난 시절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가느다란 리본으로 마감을 한 민소매 드레스, 믿기 어려울 만큼 섬세한 주름을 잡아 손바느질로 만든 원피스, 손으로 짠 리넨에 십자수로 장미를 수놓은 블라우스, 레이스로 장식한 잠옷과 속바지 들은 오래되었으나 거의 새것이었다. 심지어 한 번도 입지 않아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있는 옷도 있었다. 옷을 사들고 집에 돌아와서야, 어쩌면 한두 번 입고 난 후에 그 옷이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풀을 뽑을 때 입을 만한 옷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제대로 입지도 못할 옷들을 간직해 왔던 것이었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옷 무더기 앞에 주저앉아서 느꼈던 놀라움 속에 비릿한 슬픔이 섞여 있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에 있으면서도 다른 곳을 더 많이 바라보았던 사람이었다. 상자 속에 남겨두기로 작정한 것들은 옷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었던 어떤 사람의 흔적이었다. 내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사람이자 내가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을 사람일지 몰랐다. 안 입는 옷 몇 장을 간직한다고 해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옷들을 남겨두기로 했다. 그마저 치우고 나면 지나온 시절에 내가 어떤 기대와 소망을 품었었다는 사실조차 떠올리지 않게 될까 봐서였다.
하긴 어디 옷뿐일까. 책상 서랍 안쪽에는 깎지 않은 연필도 몇 다스, 빈 공책도 여러 권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했던 마음들을 다시 보았다. 입을 수 없는 옷들과 쓰이지 않은 연필들의 모습을 하고서 숨어있던 그것들은 늦가을 물기가 빠져버린 나뭇잎처럼 버석거렸다. 아직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도 달라질 것은 없을 터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숨이 찼다. 이사를 미루면서까지 살림정리를 했던 분의 이야기가 다시 떠오른다. 삶의 모퉁이마다 슬며시 내려놓았던 마음들과 이별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시간도 좋이 걸리겠지. 지난 계절의 몸살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