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외곽으로 이사를 하고 나니 나들이가 예전만큼 쉽지 않다. 가능하면 나가지 않으려 든다. 버스 정류장까지 내려갈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진다. 경사가 급한 언덕길을 오르내리려니 비라도 내려 길이 미끄럽기라도 하면 더 움츠러든다. 자연히 나가야 할 일을 하루에 모아 치르게 된다. 정수리에 새치가 쑥 올라온 걸 더 두고 볼 수가 없어 미용실에 가기로 한 날, 영화도 보기로 했다. 핸드폰으로 예매를 했다.
미용실에서 나와 점심을 먹고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샀다. 영화 시작까지는 좀 기다려야 해서 찻집에 들렀다. 계피향이 진한 차를 호호 불어 마시면서 쇼핑백들을 정리해 하나로 만들었다. 손가방에 쇼핑백 하나만 들면 되니 영화관으로 가는 길은 가벼운 산책이 될 터였다. 조금 일찍 일어섰다. 영화 상영시간에 앞서 도착하겠지만 늦어서 종종거리느니 조금 기다리는 편이 좋았다. 도중에 영화 예매 화면을 미리 열어둘 요량으로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으나 아무것도 잡히지도 않았다. 혹시 다른 주머니에 넣었나? 거기도 없었다. 길 한가운데서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쇼핑백까지 살폈다. 없었다. 다시 한번, 역시 허탕이었다. 핸드폰을 어딘가에 두고 온 거였다. 어디에 뒀을까? 왔던 길을 되짚어 걸으면서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열었던 곳이 어디였는지 생각했다. 차 마실 때 가계부 앱을 열었던 게 생각났다. 찻집에서 나와 달리 들린 곳은 없었으니 핸드폰은 아마 그곳에 있을 것이었다.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창밖에서 들여다보니 내가 앉았던 창가 테이블에 젊은 남자 둘이 앉아있다. 탁자 위에 핸드폰 두 개가 놓여있었지만 내 건 아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운터 직원이 나를 쳐다보았다.
“핸드폰을 두고 간 것 같은데 혹시...”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직원이 얄미우리만치 차분한 태도로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받아 들고 나오는데 맥이 빠졌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줄 알고 어쩔 줄 모르던 내 모습은 번화한 거리에서 엄마 손을 놓쳐버린 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또 외출을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전철을 탔다. 평일 오후여서 그런지 여기저기 빈자리가 있었다. 봄날 오후, 전동차 안으로 들어온 햇볕이 나른하니 살짝 잠이 왔다. 꿈인 듯 몽롱한 정신으로 얼마를 갔을까? 열린 문으로 찬바람과 함께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 순식간에 빈자리들이 채워졌다. 맞은편에 여섯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그중 둘은 일행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마주 보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각자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남자가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여자에게 보여주자 여자가 웃는다. 여자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남자에게 말을 건네지만 시선은 핸드폰에 고정되어 있다. 남자 역시 핸드폰을 바라보면서 짧은 대답을 한다. 여자는 보일락 말락 고개를 끄덕였지만 남자의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두 사람은 이내 조용해졌다. 나란히 앉아서 각자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는 연인들을 보고 있노라니 우연히 전동차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로 보였다. 휴대전화의 본래 기능이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것이란 점을 떠올려보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핸드폰 속의 무언가를 들여다보느라 곁에 있는 연인과 소원해지다니 말이다.
오래전 우리들은 약속장소를 향해 갈 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에게 집중하기 마련이었다. 어쩌다 약속시간에 늦게 되어도 발을 동동 구르는 게 전부였던 때였다. 연락할 방도가 없던 그 시절에는 바람맞고 맞히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먼저 도착한 이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아 그저 기다리거나 적당한 시간에 기다리는 걸 포기하고 자리를 뜨는 게 전부였다.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기다리던 이들의 기대에 찬 표정이 떠오른다. 그 시절 누군가를 기다려 본 사람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라고 노래한 시인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약속시간에 맞추지 못할 것 같으면 미리 연락을 한다. 만남이 늦춰질 뿐 무작정 기다리는 일이란 생기지 않는다. 기다리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약속한 이가 도착해 자기가 없는 걸 보고 아, 가버렸군 하고 돌아설까 겁이 나서 꼼짝 못 하고 자리를 지키는 일도 없다. 요즘 연인들은 바람을 맞거나 맞히는 대신 약속시간을 바꾸거나 장소를 옮긴다. 핸드폰이 ‘바람맞다’라는 동사 하나를 없앤 셈이다.
핸드폰은 멀리 있는 사람을 불러와 내 옆에 앉히고 세계를 내 손 안으로 들여온다. 가벼운 터치 한 번이면 모든 것에 가 닿을 수 있다. 시간 맞춰 차를 갈아타며 모임에 참석하고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오가는 대신 핸드폰을 쥔 채 집에 머무는 나는 예전보다 행복한가? 무엇보다 핸드폰 속의 세상은 진짜일까? 내가 올린 사진들은, 그러니까 내가 올린 사진 속의 풍경, 물건, 음식들은 실제의 나를 반영할까? 사람들이 보는 모습이 정말 내가 맞을까? 핸드폰 화면에 끊임없이 좋아요를 누르며 화면을 넘기는 자신을 남을 보듯 바라본다. 내가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핸드폰이 나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삶은 핸드폰과 온라인 쇼핑과 인터넷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자유와 선택과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설마 잊었을까? . 선택 앞에서 불안했으나 자유로웠기에 기꺼이 책임질 수 있는 삶이란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전철 안의 연인들을 바라보며 씁쓸했던 그날, 전철에서 내릴 때까지 핸드폰을 열지 않았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전철 안에서 책을 읽는 중에 오른쪽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약속장소를 바꾸고 싶다는 친구의 문자였다. 친구가 알려준 장소를 검색했다. 새로 바뀐 목적지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과 어느 역에서 전철을 갈아타야 하는지, 목적지에 가장 가까운 출구로 나가려면 몇 번째 칸에 타야 하는지 알아내느라 전철에서 내릴 때까지 핸드폰을 손에서 떼어놓지 못했다. 지나치게 의존해서도 안 되지만 없으면 불편한 게 바로 핸드폰이 가진 힘이었다. 이러니저러니 말은 하지만 결국 나 역시 언제든 핸드폰에 빠져드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부지런히 걸어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육중한 문을 밀어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기다리느라 지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