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의 청춘은 가을이다. 집 주변의 작은 숲에 사는 나무들 중에서도 제일 늦게 연초록의 이파리들이 돋아나는 밤나무는 봄이 무르익어서야 하얀 꽃을 피워서 보는 나로서는 밤나무야말로 느긋한 성정을 가졌구나 감탄하게 된다. 본래 밤나무라는 것이 가을이 와야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니 그럴 만도 하구나 하고 눈여겨 보지 않다가 장마가 시작될 때쯤이면 어느새 손톱만 한 밤송이들을 다닥다닥 단 걸 보게 된다. 기대도 하지 않고 아직 먼 일로만 여기다가 갑자기 초록색 밤송이들이 눈에 들어오면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건 무슨 이유일까. 뜨거운 여름을 보내는 사이 굵어진 밤송이에서 떨어져 나온 알밤이 데크에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 가을이 온 것이다. 아침마다 마당을 한 바퀴 돌면 한 줌씩 밤을 줍는 게 가능한 시기, 운이 좋으면 가을 수확을 하는 다람쥐나 청설모도 만날 수 있는 계절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밤조림을 만드는 장면을 보고 어서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 했었다. 밤의 속껍질을 다치지 않고 단단한 겉껍질만 얌전하게 벗겨내는 게 포인트다. 시간도 제일 많이 걸리고 실수도 잦은 부분이지만 이 과정을 넘어가면 쉽다.겉껍질을 벗겨낸 밤에 베이킹 소다를 듬뿍 뿌리고 밤이 잠길 만큼 물을 부어서 밤새 놓아두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이 담긴 냄비를 그대로 불에 올린다.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불을 제일 약하게 줄여서 삼십 분, 물에 헹궈서 물에 올리고 약한 불로 다시 삼십 분, 다시 삼십 분, 이렇게 세 번 반복을 하면 밤의 속껍질에 붙어있던 심과 잔털들이 떨어져 나가고 거의 투명하게 변한다. 이 과정은 밤을 익히기 위한 것이 아니고 밤의 속껍질의 떫은 맛을 없애고 잔털들을 정리하기 위한 것으로 팔팔 끓이면 밤이 으스러져 다음 과정으로 넘어갈 수 없으니 조심할 일이다.
밤이 단정하게 투명해지면 냄비에 밤과 삶은 밤 무게의 60% 정도의 설탕을 넣고 잠길만큼 물을 부어 조리면 된다.영화에서는 마지막에 술을 부어 향기를 더하기도 하는데 오늘은 설탕만으로 간단하게 끝냈다.
이렇게 만드는 밤조림은 일하기 싫은 날, 빈둥거리고 싶은데 핑계가 없는 날 만들면 좋겠다.천천히 껍질을 벗기고 밤새 냄비에 우리고 끓이는 듯 마는 듯 약한 불에 삼십 분씩 세 번을 거쳐야 하니 시간 보내기에 맞춤이라서 그렇다. 냄비 앞에 있으니 무언가 하는 걸로 보여서 간섭받을 일도 없고 약한 불에 올려놓기만 하면 되니 부산스럽지도 않아 멍하니 냄비를 바라보고 있거나 흩어진 생각을 모으기에 좋으니까. 게다가 완성하면 달콤하고 부드러워 감탄사가 절로 나는 반짝이는 밤조림을 자랑할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밤조림을 만드는 동안 마음속으로 달나라 여행을 다녀왔어도 아무도 모른다.
밤조리기를 마치니 해가 마당에 가득이다. 아침이지만 밤조림과 찻주전자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코스모스랑 추명국이랑 구절초와 한 시간을 보냈다. 이제 밤도 여물고 있으니 가을이 깊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