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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07. 2023

아이오와는 좋아했다

최승자, [어떤 나무들은]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와 같이 주문했는데 먼저 읽은 시인의 이야기가 너무 강렬해 내처 읽지 못하고 책장에 묵혀두었던 걸 며칠 전 시작해 오늘 새벽에 마쳤다. 그가 번역한 책과, 그의 첫 번째 시집을 주문하고 나니 밖이 훤하다. 공기질이 나쁘니 외출을 삼가라는 안내문자가 왔지만 새벽에 내린 눈은 너무 희어서 푸르스름하고.


  왜 이이의 글은 읽는 이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까? 푸하하 웃고 나서 다시 보면 웃기지 않고, 꺼이꺼이 소리까지 내며 울고 나서도 다시 읽으면 울어버릴 거였나 싶으니까. 글을 읽는 이를 글을 쓸 때의 시공간으로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지 않고서야 그토록 내밀한 순간을 ㅡ그러니까 타인의 경험을 꼭 내가 겪은 것처럼. 아니 나였던 것처럼 느꼈다는 것인데 ㅡ 손톱만큼의 이물감도 없이 한숨에 들이키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그건 글쓴이의 능력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의 상태가 그랬기 때문이라는 걸. 나 자신이 너무 답답한 심정이어서  어쩌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최승자'를 만나 분출된 것이라는 걸 말이다. 말하자면 최승자 본인이 슬픈 심정이었을 때 마침 그걸 분출할 대상을 찾아 발작적인 슬픔을 느꼈던 것처럼. 최승자에게 사샤가 엘리엇이 말한 '객관적 상관물'이었다면 내게는 시인의 글이 바로 그랬을지도.


문학 작품의 숙명이라는 것은 언제나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 작품은 대중을 동시에 상대로 하는 게 아니다. 문학 작품이 어떤 큰 대중을 동시에 상대하게 되는 것은 그 문학 작품이 갖고 있는 사회적 상징으로서일 뿐 그 실제의 작품은 아니다. 실제의 작품은 그 세부 하나하나가 모두 한 독자 내부에서 그 독자라는 한 개인과 한 인간 존재의 세부들과 만나 서로 갈등하고 마찰하고 교통하면서 전달될 수 있을 때 그 문학 작품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p.225


  새벽에 그의 트위터에 찾아가서 그의 예전 시구들을 읽다가 돌아왔다. 시인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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