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Mar 12. 2023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새로운 삶은 즐거운가요? 가끔은 당신이 부러워요. 매일 아침 갈 곳이 있다는 게.”

 이번에는 남자가 묻는다.

“당신은 어때요? 삶이 만족스러운가요?”

 여자가 대답한다.

“저 같은 여자에겐 삶이 없어요. 옷과 연회장을 선택하죠. 자선을 하고 휴가도 갑니다. 하지만 결혼하기 전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해요.”

 남자가 난처해한다.

“제가 당신을 화나게 했군요.”

 여자는 담담하다.

“제 삶 때문에 화가 난 거예요. 당신이 아니라.”     


  드라마 <다운튼 애비>의 한 장면이다.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하루아침에 작위와 영지의 상속자가 된 남자와 그 남자 때문에 상속에서 제외된 여자의 대화다. 배경은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당시에 영국 여성들에게는 상속권은 물론 참정권도 없었다. 여자들은 화가 나 있었을 터다. 하긴 여자들이 화를 내지 않을 때가 있었던가? 드라마 속의 남녀가 대화를 나눈 때로부터 거의 백 년 전에 태어난 브론테 자매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는 브론테 자매들이 요크셔의 작은 목사관에서 평생을 보내며 쓴 일기, 편지, 그림들로 그들의 비범했던 삶을 재구성한다. 샬롯 브론테가 종이를 아끼기 위해 이중의 사선으로 글을 쓴 편지, 돋보기가 없으면 해독할 수 없을 만큼 작은 필사본들, 어른들의 신문을 흉내 내어 만든 미니어처 신문들 속에서 그들의 비범함이 빛난다. 거듭되는 낙담과 좌절은 차라리 횃불이었다. [폭풍의 언덕]이나 [제인에어]를 쓸 종이를 한 번에 몇 묶음밖에 살 수 었었던 가난, 잠시도 멈출 수 없었던 운명과의 격투를 비쳐주던. 마침내 싸움이 끝났을 때 샬롯 브론테의 나이는 서른아홉, 그녀는 자매들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샬롯이 자신의 시를 묶어 계관 시인이었던 로버트 사우디에게서 보냈을 때 그녀가 받은 건 환대와 응원이 아니라 비웃음과 조소였다. 그들의 재능과 용기와는 무관하게 당시의 여자들이 문학이란 링에 오르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맞닥뜨려야 했던 것.   

   

 "문학은 여성에게 필생의 사업일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여성은 자신에게 합당한 직분에 몰두할수록 그저 교양이나 기분 전환을 위해 문학에 시간을 쏟을 여유가 없어지니까요. 당신은 아직 그러한 직분으로 인도되지 못했지만 장래에 그렇게 된다면 명성을 얻고 싶다는 열망도 줄어들 겁니다. 즐거움을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려 하지도 않겠죠."     


 그 ‘직분’은 바로 아내가 되는 일이었지만 브론테 자매들은 그 직분으로 인도되기 이전에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그들이 찾아낸 직분은 바로 가정교사였다. 그들이 목사관을 떠난 건 가정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위해, 혹은 가정교사로서 돈을 위한 때가 전부였다. 만일 그녀들이 하워스의 황량한 들판을 헤매는 대신 분주한 세계와 활기가 넘치는 도시를 여행하고, 생계를 꾸리고 아버지와 남자형제인 브랜웰을 돌보는 대신 그들이 열망했던 부류의 사람들과 접촉하고 다양한 인간들과 교제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샬롯 브론테는 감자 껍질을 벗기고 양말을 기우며 침묵하는 동안에도 경험과 교제와 여행을 꿈꿨다. 샬롯이 [제인 에어]를 쓰면서 드러내놓고 운명과 한바탕 격투를 벌인 것은 영원히 허용되지 않을 그 욕망을 잠재우는 데 실패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등장인물에 대해 써야 할 때 자신에 대해 쓴 건 아니었을까? 작가로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대신 자신의 비탄에 머무르는 실수를 저지른 것도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죽어버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마땅히 누려야 할 경험과 교제와 여행에 굶주리지 않았다면, 낙담과 좌절 대신 환대와 응원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그녀의 삶만큼 그녀의 이야기도 넓어지고 깊어졌을까? 인생이란 다면체이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걸 알게 됐을까? ‘미워하고, 사랑하고, 괴로워하는’것 외에도 삶의 틈을 메우는 비밀들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했을까?      



 그녀들의 글을 읽는 건 하얀 재에 살짝 덮인 잉걸불에 다가가는 . 누군가가 후후 작은 바람이라도 일으키면 금세 활활 타오를 뜨거운 불꽃들로 가득 찬 화로. 브론테 자매들이 태어난 때로부터 이백 년이 지났다.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오와는 좋아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