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May 28. 2023

장면들

  

  # 장면 1     

  

  TV 드라마를 보는 중이었다. 실수를 저지른 딸이 있었다.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정도의, 자칫 가족의 삶까지 파괴할 수도 있을 만큼 큰 실수였다. 딸의 비밀을 알게 된 아빠가 딸에게 미래를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실수는 없다고,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자 그때까지 딱딱하게 굳어있던 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믿었던 딸의 수치스러운 비밀을 알게 되었으나 실망과 비난 대신 기대와 믿음을 건네는 아빠와 회한과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딸을 바라보다가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코가 막히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쇄골 바로 위쪽부터 가슴이 죄어들어오는 느낌에 숨이 막혔다.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자신에게 놀랐던 건 바로 그 순간에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는 것이었다. 데일 것처럼 뜨거웠던 눈물, 매콤함으로 붉어졌던 코와 목이 메는 아픔을 그대로 옮길 수 있을까? 영화를 멈추고 새 문서를 여는 그 짧은 순간에 파도처럼 나를 덮쳤던 감각과 감정들을 놓쳐 버릴까 봐 애가 탔다.     

 

  나는 실패했다. 분명 눈물이 뜨거웠다고 썼으나 내가 느낀 뜨거움에는 미치지 못했다. 코가 막히고 가슴이 죄어들던 순간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없었다.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돌려보았다. 드라마 속의 딸은 장면이 되풀이될 때마다 매번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였다. 눈물은 어느새 말라버렸고 코가 맵지도 숨이 막혀오지도 않았다. 보는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얼마나 민망했던가. 사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숨을 몰아쉰다는 걸 깨달았다. 쓰던 글을 놔둔 채 물러날 때마다 열패감이 쌓였다. 그렇다. 아직 정확한 단어들을 고르지 못하고 제 자리에 쉼표를 찍지 못하는 것이다. 말들은 언제나 잘못 던져진 공처럼 엉뚱한 곳으로 튀어가 제멋대로 구른다. 쫓아가다가 지치고 바라보다가 낙담한 나는 결국 포기한다. 쓰는 일의 무모함을 작가들은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 장면 2

  비가 자주 내리는 계절이다. 밤새 비가 내린 아침이면 마당은 빗방울로 동글동글해진다. 빗방울은 잎 끝에 매달린 채 조금씩 커지다가 결국 제 무게에 못 이겨 한순간에 흘러내린다. 운 좋게 오목한 잎사귀에 올라앉은 빗방울은 반사경처럼 주변의 식물이나 하늘을 담고 빛난다. 빗방울의 구(球)가 홀로 흔들리다가 다음 순간 이내 흩어진다. 마당을 이야기할 때 가장 쓰고 싶은 건 바로 이런 것들이다. 바람이 불어와 고인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순간, 꽃잎 위에 내려앉은 빛의 파동, 타는 듯 매캐한 공기의 냄새를 옮기고 싶다. 보고, 만지고, 느낀 것들을 밤마다 구슬처럼 던져놓고는 미처 꿰지 못한 채 날이 밝는다. 새벽빛은 사라지고 글자들은 흩어진다.


   나는 자신을 이야기를 옮기는, 번역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지구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다른 쪽에 있는 사람들의 언어로 바꾸는 일이 번역이라면 장미가 꽃잎을 여는 모양을, 새 짖는 소리에 놀란 고양이를,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외침들을, 그늘진 곳의 외로움과 강요된 침묵을 글자로 옮기는 것도 번역이다. 걱정과 염려만으로도 사랑을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운이 좋은 날이면 식탁에 놓인 두부조림 접시 아래에서도 숨겨진 이야기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접시 아래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던 여자를 일으켜 앉혀 이야기를 듣는다. 그릇 밑에 왜 숨어있었는지, 엎드린 채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내려 애쓴다. 내가 들었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옮기는 일,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왜’와 ‘어떻게’가 전해지는 글을 쓰는 일.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제를 흉내 내느라 새벽까지 깨어 있곤 한다.  사제는 새소리와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바람이 코트 안으로 휘몰아칠 때 복도의 옷걸이에서 나는 독특한 소리까지도 악보에 옮긴다. 사제가 소리를 기보하던 방법을 훔치고 싶어서 물 잔의 얼음이 녹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여름 오후 화르륵 떨어져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만드는 장미들을 지켜본다. 글을 쓰는 저녁은 파도처럼 일렁이고 나는 파도를 탄 듯 멀미가 난다. 늦게 도착한 만(灣)에서 비로소 안도하는 밤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는다. 밤은 새벽을 데려 오고 새벽은 내게 다른 눈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낮에 뜬 베를 밤마다 풀어버리는 페넬로페처럼 밤에 쓴 것들을 새벽에 지워버리는 게 바로 그 눈이 하는 일이라서. 그렇게 언어에 예민하고 싶다. 맨몸의 단어들을 엮어서 소리를 만들고, 문장들이 흘러 바다에 닿는 꿈을 꾸느라 밤이 여윈다. 많이 쓰고 더 많이 지우는 것, 그게 요즘 내가 하는 일이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브론테 자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