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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n 05. 2023

나이든 여자의 하루

아니 에르노, 이브토로 돌아가다


  눈을 뜨자마자 하는 행동은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다. 보통은 키 큰 나무들 가지사이로 햇살이 파고드는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곤 하는데 오늘 아침은 달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표현을 쓴다면 바로 오늘 아침의 내게 딱 들어맞았다. 뾰족하고 둥그스름한 유월의 푸른 잎새마다 황금빛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으니까, 그걸 바라보면서 벌써 이틀째 일기를 거른 게 생각났고,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나도 모르게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으니까. 이래서는 안 돼, 내 귓가에 입을 갖다 대고 귓속으로 밀어 넣듯 소리 낸 한 마디.     


  

  그러나 그뿐, 내 하루는 그냥 흘러갔다. 물 주러 나갔다가 웃자란 상추를 뜯고, 루꼴라를 잘랐다. 산딸기를 따다가 가시에 긁히고, 토마토를 사러 갔다가 얼결에 배추까지 사들고 와서 생애 처음으로 겉절이를 담갔다. 새우젓, 멸치액젓, 마늘, 생강, 고춧가루, 홍고추,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내 부엌에 마침 다 있었을까? 부추와 쪽파마저도 말이다.  


   

  여름빛은 오후에 한층 농밀해진다. 그늘이 짙어져 숲은 어둡기까지 한데 두런두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비둘기는 한결같이 게으르고 뻐꾸기는 잠투정을 하듯 목쉰 울음을 운다. 고인 빛이 문득 출렁이면 멀리서 오는 바람에 눈시울이 시었다. 머릿속에는 소금 항아리와 종각 사거리 빌딩위에 걸려있던 달, 트럭 뒤에 주저앉아 확성기를 들고 노래하던 여자, 플래카드를 끌며 따라가던 지친 사람들이 몰려왔다 멀어진다. 깜짝 놀라 일어나니 저녁 하라는 알람. 이미지는 모두 사라지고 글자들은 흩어진다.     


  

  모로칸민트는 샴페인 빛, 코에 먼저 닿고 혀끝에 잠시 머물다가 목을 타고 넘어간다. 목이 길어서 나이 들면 고생 좀 하실 거예요. 그게 언제 들은 얘긴데 여전히 남아있나. 목의 주름을 감출 도리가 없는 나이든 여자의 하루.     


매일 글을 쓰려고 애쓰지만 일상생활에서 비롯되면 이유들로, 그러니까 약속이라든가 급하게 장을 봐야 한다든가 하는 이유로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 중략~~~~     

하지만 실제로는 글에 대한 생각이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건 마치...... 마치...... 제가 두 차원에서 사는 것과 같달까. 실생활에서 살아가고 ㅡ 지금 여기에서처럼요 ㅡ 또 다른 차원, 그러니까 저와 붙어 다니는 책을 쓰며 글쓰기 속에서 살아가는 거죠. 그야말로, 글쓰기 강박이라고 볼 수 있죠. 삶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적이 있긴 합니다만, 사실상 삶을 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한 글쓰기 강박을 늘 갖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 스무 살에 품었던 글을 쓰고 싶다는 저의 야망, 저의 욕망 ㅡ 그것이 좋은 것이었는지 나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ㅡ 을 생각해 보면,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게 가장 중요하겠죠.     

                                                                아니 에르노, 이브토로 돌아가다. pp121~122     


  

  나는 스무 살에 품었던 꿈도 없고, 훨씬 시간이 지나 뭔가 해보려 했을 때조차 그 꿈은 글쓰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뭔가 해보고 싶었을 때마다 그 앞을 가로막는 게 있었다고 할까.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더더욱 없는 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두 차원에서 살고 있는 건 분명하다. 한쪽에는 토마토와 배추 겉절이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어설프나마 글자들을 모아 집을 짓고 마을을 꾸미는 세계가 있다. 그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지만 훗날, 아니 에르노처럼 오래 살 수 있다면, 그때 나도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데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 밤에는 아니 에르노가 친구처럼 느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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