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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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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l 29. 2023

雨期의 庭園

  장마철이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마당과 실랑이를 하는 날이 간다. 비가 내려도 꽃은 피고 상추잎은 커진다.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던 아침에 젖은 장화에 발을 꿰고 나가면 토마토는 터지고 장미관목 아래에는 꽃무덤이 소복한데 블루베리 가지마다 레이스 같은 거미줄이 아슬아슬하다. 개양귀비가 흔적도 없이 사그라진 옆에서 마가렛이 시무룩하다. 그냥 돌아설 수 없어 녹이 슨 바구니를 팔에 끼고 마당을 한 바퀴 돈다. 손끝만 대도 화르륵 쏟아져버리는 장미가 제일 처음이다. 한창때를 지났으나 여전히 꽃봉오리를 만드는 이 아름다운 식물은 보고 만져주면 기뻐한다. 가시에 긁힐 때마다 아얏, 작은 비명을 삼키면 새로 열리기 시작한 꽃잎 사이에서 향기가 폭죽처럼 터진다. 장미 앞에 서 있을 때면 따가운 햇살이 뒷목을 뜨끈하게 달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것은 혹시 사랑인가.   

   


  장미가 모여 사는 옆에는 목련이 서있다. 목련 아래는 마당에서 봄이 제일 먼저 오는 자리다. 그래서 손톱만큼 작은 원종 튤립과 히아신스가 좋아하는 곳이지만 여름인 지금은 페퍼민트가 자란다. 손가락으로 민트 잎을 문질러 코끝으로 가져가면 가슴속까지 서늘한 향기, 비록 너무 무성하게 자라 눈총을 받다가 잘려 버리기를 거듭하지만 더할 수 없이 태평하다. 마지막을 알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 줄래 묻고 싶을 만큼. 민트와 섞여 어우러진 명이와 곰취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명이는 긴 꽃대 끝에 구슬 같은 씨방을 동그랗게 달았다. 얼마 안 있으면 곰취도 노란 꽃이 줄지어 핀 꽃대들을 밀어 올리겠구나. 고개를 들어 목련의 푸른 잎을 바라보는데 빗방울이 얼굴 위로 툭 떨어진다. 차갑다. 앉은걸음을 하고 뽑은 잡초들로 바구니가 반 너머 찼다. 별꽃, 양지꽃, 괭이밥, 깨풀, 제비꽃, 주름잎, 바랭이, 나와 함께 살고 있는 풀들, 오늘은 뽑혔지만 한때는 어여삐 여겼던 것들이다.     


  뒤로 돌아선다. 감나무, 매화나무, 배롱나무가 나란히 산다. 사람으로 치면 청소년쯤 될까. 이른 봄 꽃과 새잎을 보여줄 때는 어엿하다가도 목련이 피고 옆집 벚나무에 꽃이 달리면 어린양을 하느라 까칠해져서 토라지는데 그때는 다 그렇거니 모른 척하노라면 알아서 매실도 달고 감꽃도 핀다. 매화나무 아래에 거두지 않은 매실이 노랗게 익어 떨어져 있다. 향기에 이끌려 주저앉고 만다. 농익은 매실이 여럿 뒹군다. 거기 크리스마스로즈가 있다. 활짝 펼친 손바닥 같은 잎이 청청하지만 올해 꽃을 피우지 않았다. 힘을 모으는 중이거니 믿고 기다릴 뿐. 바로 옆에서 무수히 돋아나는 조팝나무 새순이 달리기 하는 아이들처럼 보인다. 손톱만큼 작은, 연둣빛 잎을 달고서. 흙투성이가 된 이파리도 여럿 보이는 걸 보니 지난밤 마당은 쏟아지는 빗소리에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툴툴거리다가 터지는 웃음으로 소란했겠네.   


   

  분꽃은 아침저녁으로 핀다. 게으른 이에게는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이 꽃의 씨앗은 작년 가을 엄마에게서 얻었다. 한두 포기만 있어도 어스름한 저녁 마당을 밝히기에 충분하다고 했으니 지금 마당은 초과상태, 곱슬머리 여자아이처럼 귀여운 꽃은 한낮이 되면 주먹을 쥔 아이의 팔과 똑같은 모양으로 귀엽다. 플록스와 백합과 나무수국이 어울려 핀 소나무 아래는 지난 계절 작약과 라즈베리가 무성했던 곳이다. 라즈베리는 정리했고 플록스와 백합은 장마가 끝나야 사그라질 터 나무수국은 그때나 되어야 고적해질 것이다. 옆에서는 열매가 익어갈 즈음 가지를 잘린 앵두나무가 푸르게 회복 중이다. 내가 처음으로 내 손님을 맞이한 건 딱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여름방학을 하고 며칠이나 되었을까. 느닷없이 내 이름을 부르면 들어섰던 친구, 예상치 못했던 방문에 화들짝 놀란 나는 얼떨결에 그 아이를 앵두나무 아래 평상에 앉혀놓고는 부엌으로 뛰어들어갔는데 마땅히 내놓을 게 없어 엄마가 아끼는 유리 저그에 얼음을 담아서 인스턴트 주스 분말을 듬뿍 넣고 저어서 가져갔더랬다. 집에 나 이외에는 없었고 친구는 식구들이 돌아오기 전에 일어섰으니 그는 그대로 없는 사람이 된 여름, 대학 일 학년이었다.      


  

  부러진 나뭇가지와 시든 꽃들, 손이 닿는 대로 뽑은 풀들로 바구니가 가득 찼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다.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진다. 한바탕 쏟아지려나 보다. 급해진 마음으로 토마토와 오이 덩굴을 들춘다. 방울토마토 몇 개, 오이 한 개, 상추 대여섯 장, 고추 서너 개, 오늘 아침의 수확이다. 돌아서려는 데 바질이 보인다. 성급하게도 꽃송이를 만들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허리를 굽히고 손을 내미는 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엄마, 뭐 해?”    


아침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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