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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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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Nov 22. 2023

나무에 기대어 또 한 해를 살았습니다

나무들의 겨우살이를 준비하며

   추워졌다. 거실이 온실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마당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화분들이 들어온 때문이다.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봐야 할 만큼 높이 자란 유칼립투스와 해피트리, 십 년 넘게 함께 살고 있는 올리브와 치자, 헤아리다 보면 두 손이 모자라는 이런저런 이름들의 식물들과 거실을 함께 쓴다. 겨울은 모든 생물에게 똑같이 다가온다. 나무와 새, 길고양이와 인간들이 공평하게 추위를 느낀다. 조금씩 거리를 좁히고 모르는 척 가까이 서있는 게 자연스러운 계절이다.      


  화분들이 사라진 마당은 휑하니 허전하다. 미처 거두지 못한 울타리콩 덩굴, 서리가 내릴 때까지 꽃을 피운다던 분꽃, 며칠 전까지만 해도 푸른 잎이 청청하던 수국들이 후줄근하다. 서리에 타버린 고춧잎들 사이로 선명한 붉은색이 보인다. 미처 거두지 못한 고추다. 다가가서 보면 얼었다 녹아버린 부분이 물러져 있을 것이다. 새싹이 나와 제법 자란 물망초들도 풀이 죽었다. 고양이들이 야옹거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보인다. 물그릇이 얼었다. 주목 옆에 죽어버린 구상나무가 을씨년스러워 피하듯 돌린 시선이 라일락에 붙들려 옴짝달싹을 하지 못한다. 지난가을에 나뭇잎이 뻣뻣해지고 군데군데 검은 반점이 생겨서 병이 든 것처럼 보이는 나무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던 기억이 났다. 폭우와 폭염이 유난했던 여름 끝이라 그렇거니 가을을 순하게 지나고 나면 나아질 거라고 내가 나를 안심시키느라 애썼던 며칠을 떠올린다.  

    

  나무를 심으면서 했던 생각 - 라일락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동안에는 나 역시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 이 떠오를 때마다 마당에 나가 줄기와 잎을 유심히 살피곤 했다. 우연이겠지만 나뭇잎이 시들하니 힘이 없는 걸 보고 들어오는 날에는 피곤하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생각날 때마다 나무의 안위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나무가 활기가 넘쳐 보이면 힘이 났고 지쳐 보이면 겁이 났다. 몸살이라도 며칠 앓고 나면 나무 역시 나른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날에는 자주 드나들며 나무를 바라보고 이파리를 만져 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신기하게도 나무 역시 조금씩 괜찮아지는 느낌이 들어 마음을 놓던 날들도 있었으니 내가 만든 신화에 나를 가두었던 셈이다. 계절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나는 유리문 안쪽에서 쌀을 씻거나 설거지를 하면서 갈빛으로 물든 잎들- 병든 잎들도 섞여 있는 - 이 떨어져 나가는, 점점 홀가분해지는 라일락을 바라본다.     


  점심시간마다 하얀 블라우스에 초록색 점퍼스커트를 덧입은 여자 아이들이 건물 뒤편의 라일락 아래 놓인 벤치 주위에 모여 있었다. 나무는 가지를 넓게 뻗어 그늘을 넉넉하게 만들었고 무성한 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간지럼을 타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월이면 학교의 주인공은 라일락이었다. 라일락이 한창인데 왜 창문을 열어두지 않았느냐는 선생님이 있었고 라일락 향기 때문에 수업을 못 하겠다며 창문을 닫으라는 다른 선생님이 있었다. 미술시간에는 교내 여기저기 흩어져서 라일락을 그렸고 점심시간이면 라일락 그늘을 지나 소운동장과 교내식당과 체육관을 오갔다. 복도의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면 꽃그늘 아래에서 라일락 향기와 함께 말소리, 웃음소리가 올라오곤 했다.     


   소곤거리고 웃음을 터뜨리던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모습이야 그때와 똑같다고 할 수 없어도 어조나 웃음소리, 표정과 몸짓들은 그대로여서 교복을 입지 않았어도 라일락 그늘 아래에 모여 있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누구는 외국에서 살고, 누구는 사고를 당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뒤늦게 공부를 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몇 년째 요양원에 있는 친구도 있었다. 친구들 하나하나가 라일락 이파리 같았다. 봄에 만났던 우리는 각자의 여름을 지나 잎의 색이 바뀌는 계절에 다시 만난 셈이었다.    

  

   집에 돌아와 헐벗은 나의 나무, 라일락을 바라보았다. 왜 하필 나무였을까? 왜 하필 나무에게 자신을 걸었을까? 한때는 잎을 떨구는 나무를 바라보며 잘도 놓아버리는구나 여기기도 했다. 죽음처럼 고요하고 무거운 겨울을 묵묵히 견뎌내는 나무들의 용기를 닮고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매해 봄이면 처음인 듯 솟아나는 새싹들의 맹렬함이 부러웠다. 다시 어린 소녀가 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나와는 달리 봄마다 투명한 아기 손가락 같은 잎을 달고서 반짝일 나무를 상상했다. 내 마당에서 매해 일어나는 기적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되돌아갈 수 없다는 슬픈 운명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있는 나무가 부럽다. 아니 정확히 ‘부러웠었다’. 부러웠다는 단어를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은 몇십 년 만에 만난 친구들의 싱그러운 웃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웃을 수 있었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 쉽게 지치고 회복이 더디다. 먹어야 할 약들이 시나브로 늘어나고 얼굴에서 빛이 사라진다.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나무가 하나 둘 잎을 떨어트리며 색을 잃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나무와 인간이 같은 질서를 따르는 건 여기까지다. 나무는 병든 잎을 떨구고 이듬해 새 잎을 만들어도 인간은 그대로 늙어갈 뿐이다. 돌아갈 수 없으므로 있는 힘을 다해 더 잘 살아야 할 의무가 생긴다. 겨울 거실의 화분에 물을 주며 지내다 보면 봄은 라일락 꽃눈을 가지고 올 것이다. 다시 돌아오는 봄을 맞이하는 건 살아있어 가능한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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