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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r 26. 2023

시골에 살아요

시골살이, 오늘도 균형

   책봉투에 붙은 주소 라벨에 큼지막하게 '시골'이란 글자가 찍혀 있다. 온라인서점에서 책 보낼 때 도시와 시골을 구분할 이유가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을 꺼내다가 풋 웃음이 터진다. 책 제목이 [시골살이, 오늘도 균형]이었다.

  분당에서 광주로 이사 간다고 했을 때 아이의 선생님은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냐고 물었다. 마당 있는 집에 살고 싶어서라고 했더니 아, 전원주택으로 가시는군요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분 앞에서 어쩔 줄 몰랐던 때로부터 10년이 훌쩍 넘었다. 시골의 사전적 의미는 '도시에서 떨어져 있는 지역. 주로 도시보다 인구수가 적고 인공적인 개발이 덜 돼 자연을 접하기가 쉬운 곳'이다. 그럼에도 시골이란 단어에서 곤궁이나 실패 그리고 도피의 냄새를 맡는 이들이 있다. 그리하여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냐는 질문을 한다. 아마도 [시골살이, 오늘도 균형]의 저자들도 무수히 받았을 질문.



  미국 생활을 접고 충남 논산에 '꽃비원'이란 농장을 일구기 시작한 지 10년이라고 한다. 목표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 책에 담은 이야기는 그곳을 향한 여정이다.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친다는 걸 알았다. 나는 꽃비원 식구들이 논산으로 내려가기 두어 해 전에 이사를 했다. 꽃비원의 이야기를 읽는 건 그동안의 내 삶을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는 동시에 그 삶을 가능하게 해 준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기도 했다.


  이사한 첫해 가을, 이상한 열정에 사로잡혀 주말마다 인근의 농장을 찾아다니던 일, 손톱 밑에 박힌 흙알갱이를 파내다가 터트린 웃음, 마당에서 먹고 마시던 음식들, 해 넘어가는 줄 모르고 풀을 뽑고, 가시에 긁히고 모기에 물리며 따모은 산딸기, 미처 먹지 못한 바질이며 월계수 잎들을 말리던 채반들, 밤을 졸이고 토마토소스를 만들던 날들과 잼을 젓던 달콤한 주걱들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따라 나왔다.

 주말마다 찾아다니던 장터들, 봄이면 하루가 멀다 하고 달려갔던 남한산성 입구의 오전리 채소장터,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낯을 익힌 농부들의 농장 나들이, 손이 왜 둘밖에 없을까 아쉬웠던 마르쉐@, 일본에 갈 때마다 시간을 쪼개 들렀던 아오야마 파머스마켓, 주문했던 걸 잊을 만큼 시간이 지나 도착했던 그래도팜의 토마토가 준 기쁨, 제철 채소와 직접 만든 두부와 머루로 담근 와인들이 들어있던 꾸러미, 좋아하는 영화들, 그리고 헬렌 니어링과 장 지오노까지, 잦아들어가는 모닥불 앞에서 좀처럼 떠나지 못했던 밤을 다시 보는 기분.


  돌아보니 즐거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는 일이 수월할 리가 없지 않겠나. 때로 사는 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져서, 발목을 간질이는 물살을 바라보다가 아찔해서 휘청거릴 때, 그때 내게로 다가온 손들이 없었다면, 그 손들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들은 말한다. '돈도 필요하고 집도 필요하지만 자연을 관찰할 수 있는 섬세함이 중요하다고. 작은 것들을 눈여겨보고 놓치지 않는 섬세함이 있어야 씨앗에서 시작되는 생물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나는 그 말을 내 일상에도 끌어다 붙인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든 삶 자체가  '사소하고도 당연한 즐거움, 아름다움, 편안함' 등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아는 이들은 작은 것들의 힘을 알고 있다. 시골살이에만 균형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이미 서로의 삶에 깃들어있다는 사실도. 그걸 오래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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