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산중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Dec 28. 2022

가을을 건너 겨울에 이르다

9월부터 12월까지의 일기

9/5


함께 모여 수다 떨고 웃는 것도 좋지만 혼자 있는 건 더 좋다. 반짝이는 햇살과 나뭇가지들이 만든 그늘 아래 스르륵 지나가는 뱀처럼 소름 돋는 바람도 좋지만 어스름 불빛에 코끝에 스치는 편백나무 향은 더 좋아. 사방의 문을 닫고 눈도 귀도 닫아버리는 시간을 귀히 여기지만 양손에 든 장바구니를 가득 채우고 비틀거리며 장터를 벗어나는 건 또 얼마나 좋은지. 이렇게 진지한 장보기가 얼마만일까.


추석이 다가온다.



9/17



소금을 채우는 날은 가벼운 사람이 된 것 같다. 굵은소금을 한 줌 쥐고 가시오이를 문지르거나 끓는 소금물에 취를 데칠 때처럼 말이다. 그럴 때 나는 매끄럽고 초록이 진해진 오이 혹은 맑고 순하게 다시 태어난 취나물이 되는데 그건 바로 이런 기분.


나는 다른 존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어. 올여름 내내 나는 고양이처럼 예민했거든. 깜짝 놀라거나 꿈을 꾸고 있거나 생각에 잠겨 있었지. 이제 나는 다시 힘이 넘치고 팔팔해졌고, 다시 한번 삶에 굶주려 있어. 다 당신 덕분이라고 믿고 있어. 그러니 이 편지는 감사장이지.


1928년 10월 5일에 비타가 버지니아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소금도 편지도 최고네.



9/23



지금 내 기분에 딱 맞는 곳.

나는 모든 부름과 유혹에 문을 닫고, 비올라 음반과 초콜릿빛 동굴로 숨어들었다. 구석진 내 작은 방에서 음악과 오디오북을 번갈아 듣다가 고개를 떨구고 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동면 같은 칩거를 마치고 가을이 진작인 마당에서 창백하고 우아한 장미를 맞이한 아침.


노란 가을빛 아래에서 나를 찾는 전화를 받다.



10/6



장미가 아직도 피네.라고 생각했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시선이 가닿을 때마다 아주 잠깐, 간밤에 비가 내리더니 몇 송이 더, 날이 추우니 색도 더 곱다고. 제대로 마치지도 못한 한두 마디가 고작이었다. 이슬이 채 걷히지 않은 오늘 아침에 장화를 신고 장미 앞에 섰다. 수분이 날아가 푸석한 꽃잎에 손을 대자마자 꽃잎이 쏟아진다. 고개를 숙여보니 그곳은 장미의 묘지. 거울 속 푸석한 얼굴이 새삼스럽네.


10/8



아무것도 남지 않겠네

오늘 같은 날에는

무엇도 숨길 수 없겠어

이런 하늘 아래에서라면

하나씩 벗어던지고 계속 가다 보면

거기 모두가 정확하게 똑같아지는 각자의 지점이 나올 것만 같아


10/10



평소 금이 간 찻잔이나 이 빠진 접시로 차를 마시거나 반찬을 담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처음에야 놀라기도 아쉽기도 했지만 못 본 척 그대로 사용하기가 다반사다.  그리 오래 써오다가  밝은 날이연 갑자기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상처들. 실금의 색이 진해져 있다. 어떻게 이런 걸 쓰고 있나 들여다보다가 이제 그만 쓰자 싶다. 내친김에 그릇 선반을 둘러본다. 쓸만한 그릇들은 모셔두고 짝 잃고 서러워서 빛바랜 밥공기며 찬그릇들로 상을 차려왔다는 걸 알게 된다. 이런 바보가 있나.


10/21



나무들이 들어오고 추레해진 고추와 가지가 뽑힌다. 붉게 익은 토마토 몇 알을 챙겨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못 먹을 만큼 병들고 늙은 열매다. 울타리 밖 경사진 산비탈(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깝고 야트막한)로 구슬 같은 토마토를 던진다. 토마토가 굴러내려 가다가 작은 돌틈에 끼어버리고 그대로 물러서 썩어버리는 상상을 한다. 과육은 사라지고 씨앗만 남은 채로 겨울을 나야 하는 토마토가 눈과 얼음을 이기고 내년 봄에 싹을 틔울 가능성을, 쌓인 낙엽을 밟으며 비탈을 내려가 애기 단풍나무를 닮은 토마토 싹을 찾아서 두 손으로 들고 올라오는 내 모습을 그려본다. 올 겨울을 함께 보낼 작은 비밀이 하나 생긴 아침.


아무도 없네

장미를 벗 삼아 차 한 잔

시월의 일요일


11/9


연주가 시작되기 전 공연장에 일찍 들어가 내 자리에 앉아있는 걸 좋아한다. 비어있는 좌석들과 포디엄, 천장의 조명과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좋아한다. 연주자들이 들어오고 박수가 터져 나오다가 일순간 고요해지고 뒤이어 흐르는 선율은 내게 항상 기적 같고.


12/9



동인지 [녹색수필] 2호가 도착했다. 투명한 것, 반짝이는 것, 작은 것, 초록색, 글자, 빗소리, 어둠, 내일의 약속, 오늘의 기쁨이다. 구슬 꿰듯 책을 만들어준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아침.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 작은 문집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12/14



말린 사과 한 조각과 시나몬 스틱이 든 찻잔을 앞에 놓고 카페에 앉아있던 어제 오후. 갑자기 소란해진 느낌에 창밖을 보니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옷자락을 움켜쥔 채 뛰고 있다.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휘날리는 눈송이 너머로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사울 레이터의 사진처럼 보이겠다. 결국 마지막 언덕을 넘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 걸어 올라와야 했던 어제저녁. 아침은 눈으로 반짝반짝. 온종일 기온이 낮아 눈이 녹지 않는다. 카메라를 쥔 손이 얼얼하게 아프다. 채 일 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12/18



어제 문학회 송년모임에서 옆에 앉은 분이 눈물을 얼마나 흘리시던지 긴장해서 숨소리도 내기 어려웠다. 잠시 후에는 발밑에 놓인 가방을 계속 뒤적이길래 괜찮은가 싶어 마음을 놓았는데 곧 안경을 벗어 한 손에 들고 다시 가방 속으로 다른 손을 넣어 휘휘 젓다가 빨간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묻는 게 아닌가. 이유도 모르는 눈물이었지만 어쩐지 슬픔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 다행스러웠다.

돌아오는 밤, 최강한파라고 해서 걱정했지만 많이 걸어서인지 춥지 않았고.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아 떠오른 생각들


1.10,100 보를 걸었다는 게 신기함

2. 신형철 님 사인회를 그냥 지나쳐 온 바보가 바로 나

3. 혼자서 쇼핑용 외출은 이제 무리, 가방이 너무 무거움


가방 정리 하다 보니 손수건이 3 장이나 들어있다. 나갔다 오면 가방 던져놓고 다음에 나갈 때 손수건 한 장 챙기는 걸로 외출준비가 끝인 사람이니 그러려니 해도 옆에 앉은 이가 눈물을 흘리는데 손수건 건네줄 생각도 못했다는 게 어이없음.


크리스마스가 올 때마다 선물 주기를 즐거워하는 할머니가 되어야지.



12/22



 옛것은 행복을 준다. 행복으로 배부르게 해주는 일용할 양식이다. 일용할 양식은 매력이 없다. 매력은 순식간에 빗 바랜다. 반복은 매력 없는 것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에서, 실낱에서 집약성을 발견해 낸다. 그렇게 반복은 삶을 안정화한다. 반복의 본질적 특징은 '집안에 들기'다.


[리추얼의 종말]은, 그 안의 문장들은 자주 떠오른다. 내 안에서 농익는다. 그 말들이 내 말인 것처럼, 몸속에 들어온 이물질이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양 자리를 잡고 기능하는 것처럼.


동지다. 팥물은 겨울밤처럼 어둡고 쌀알은 흰 눈처럼 가볍다. 모두 안녕하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8월의 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