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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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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ug 30. 2022

8월의 일기

8/2



서재에서 계단참으로 이사 온 책장 위에 올려져 있던 것. 몇 년 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산 빌라트의 향초. 초는 다 탔지만 버리지 못했던 도자기다. 다크 초콜릿 한 줌을 넣어 내 방으로 왔다. 시시때때로 당이 떨어져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한 것이라는 건 핑계고 사실은 저 희고 얇고 가벼운 몸을 자주, 오래, 가만히 바라보고 싶어서다. 한 시간 풀을 뽑았더니 손가락이 퉁퉁 부어올랐다. 뭔 일일까?



8/3


    약속시간에 늦은 친구가 이유를 말해줬다.


"준비하고 나오는데 갑자기 어질러진 식탁이 신경 쓰이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식구들이 저 식탁으로 나를 기억하겠구나!"


    다시 들어가서 식탁 정리하고 화장대도 정리하고 욕실도 들여다보고 그러느라고 늦었다고. 며칠 전에 찍은 사진 속에서 찍찍이 테이프, 물파스, 열쇠 꾸러미, 손소독제, 종합비타민 상자를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떠오른 이야기다. 나를 물파스로 기억하지는 마세요~


8/5


나는 무거운 사람이고

커튼은 종일 휘날리고

매미들도 지쳐서 소곤소곤


나는 우리 집이 비행기 지나는 길 아래에 있는 줄도 모르고 매일 마른하늘에 천둥소리가 왜 나나 했지 뭐예요!


어젯밤에는 비몽사몽 앉아있다가

눈 뜨고 잠꼬대를 했다.

사람이 점점 이상해져 간다.


8/7


비가 그쳤고 매미가 나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수로를 따라 내려가는 빗물의 기세에 눌릴까 맹렬하게 운다. 며칠 전 잠자리가 보여서 여름이 우습다고(여름답지 않은 여름이 이대로 내빼는 것 같아서) 여겼더니 역시 너무 성급했던 거였다. 비가 더 내릴 거고 구름이 흩어질 때마다 목 뒤가 뜨거울 것이다. 매콤한 햇빛에 매미소리가 어우러지면 덥다고 뜨겁다고 수선을 피우며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8/7 오후


제멋대로 자란 가지들이 휘어지고  넘친다. 호우와 폭염을 핑계로 제때 손보지 못한 마당이 작은 정글 같다. 밀짚모자로 머루 줄기를 밀고 수국 사이를 빠져나가려는 찰나 발에 뭔가가 걸린다. 나만 화들짝 놀라고 그늘 아래서 잠자던 '감자'는 몸을 돌려 자세만 바꾸고 그대로 잔다. '감자'는 '셋째'가 낳은 천하태평 고양이다. 이름이 붙은 고양이가 늘어난다. '둔둔이', '둘둘이'. '도토리'. 감자와 도토리는 겨울을 집안에서 났다. 문을 열면 들어와 뒹군다. 망설임 같은 건 모른다.


요즘 들어 이름이 가진 힘을 실감하는데 특히 감자! 예전에는 감자라고 하면 분이 뽀얀 하지 감자나 시원한 감잣국이 생각났는데 요새는 우리 집 마당의 느긋한 노란 고양이가 생각나는 식이다. 덕분에 '감자'를 잘 못 먹는다. 몇 알 남은 감자에 싹이 나지 않았나 싶다. '감자'가 발목 근처에서 놀고 있는데 어떻게 '감자 고추장조림'을 검색할 수 있겠는가!


8/10


    누가 물으면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때가 올 거라고. 내가 그림자를 등에 지고 벽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꽃들은 피고 졌으며 계절도 오고 갔다고 하네. 햇빛이라도 모으는 중이라고 말할 걸!


8/11


    돌이켜보면 6,7년에 한 번씩 이사를 했던 것 같다. 이사를 한 이유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뭐 심심해서 이사를 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그때는 그때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쉬운 결론을 내린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십 년이 넘었다. 이사 예정은 없지만 내 몸에 이사 사이클이 새겨져 있는 탓인지 몇 년 전 며칠에 걸쳐 가구 배치를 바꾸느라 법석을 떤 적이 있다. 어제오늘 공부방 책상과 책장 위치를 또 바꿨다. 몇년 전 끌어내린 계단참의 책장을 다시 올렸다. 학기 초에 책 겉표지 싸고 새 공책에 이름을 적는 아이 같은 기분이다. 해법수학 책을 사서 책상에 올려놓고 설레던 그때로 돌아간 느낌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책장 옮기고 나서 얻은 깨달음은 이사는 다시 못할 거란 사실(너무 힘들어서)과 책장은 처음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이란 사실(그러니까 몇 년 전 그 수선은 불필요한 일이었음)이다.


8/13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다른 사람을 만났다. 여태 살면서 한 번도 겪지 못한 일,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8월 둘째 주. 일단 일정표에 적힌 약속들을 소화하고 내 방 의자에 앉으니 몸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한다. 해야 할 일이 끝없이 이어지면 하고 싶은 일은 그만큼 밀리는가 싶은데 그걸 참을 수 없어서 그렇다면!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밀릴 손가 싶은 거다. 편지 한 줄을 끝맺지 못하고 한 시간 동안 졸던 날, 안경도 못 벗고 자다가 일어나 양치질을 하던 날, 알람을 누르고 다시 잠든 새벽이, 잠에 빠져들고, 잠에서 깨어난 모든 순간이 쓰다 멈춘 편지들이 일주일의 끝에 닿아있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다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싶다가

이렇게라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8월도 절반이 갔다.


8/15



    사는 건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렇다고 복잡하지도 않다.  삶은 애초에 우리의 기대를 채워줄 생각은 없었던 게 분명하다. 마음대로 되는 인생이 없는 이유다. 그걸 알면 세상은 고요해지고 완벽해져서 더 이상 필요한 게 없다. 나는 그저 존재하는 게 전부인 사람처럼 새벽을 맞이하고 그날로 걸어 들어간다. 더 잘하겠다고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매가 있는 바로 이곳에서 나는 쉴 수 있게 된다. 이곳에서 나는 자유롭다.  

   가끔 친구를 만난다.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서로를 바라보거나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돌아와 생각해보면 우리가 나눈 건 말이 아니라 침묵임을 알게 된다. 나무와 건물 사이로 뻗어가는 소실점을 함께 바라볼 때의 옆얼굴을 기억하고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를 읽어내고 비밀을 해독하는 것, 그리하여 마크 헤이머의 [두더지 잡기]를 읽는 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다.

   이제는  종종거리는 대신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바라보는 게 더 좋은 나는 세상의 모든 변화가 그저 일어나는 거라는 걸 이해한다. 또한 변화는 항상 찾아오는 것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인다. 내가 할 일은 작가의 말처럼 한 걸음 한 걸음씩 계속해서 평생을 내딛는 일이다. 평범하고 쉬워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성스러운 기운이 있다.


"먹고 걷고 잠자는 데에는. 이 들판을 걸으며 두더지를 찾는 데에는. 고지서 요금을 내는 데에는. 우리의 낮과 밤을 함께 보내는 데에는." 마크 헤이머, [두더지 잡기] p.158


8/16



    비가 그쳤다. 길게 앓던 이가 자리를 걷고 일어나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보듯이 종일 하루가 낯설다. 오랜만에 오븐을 켜고 마당을 들락거렸다. 어둡고 차가운 방바닥에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다가 문득 깨닫는다. 조심하고 피하고 기다리는 일은 좀처럼 끝나지 않겠다는 걸. 이게 바로 앞으로의 내가 살아갈 세상이라는 걸. 그렇다면 흠! 어디 한 번 볼까?  핸드폰에 찍힌 사진 몇 장으로 하루를 복기하는 삶이라니 이건 어느 시대 누구의 농담인지.


8/19


어제는 빨랫줄 가득 빨래를 널었다. 어떤 건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거리고 또 어떤 건 나무판자처럼 딱딱해져서 파닥거린다. 바람을 거스를 정도로 굳어져버린 그것들은 대부분 아주 오래된 수건이나 테이블보 들이다. 사람도 그럴까 싶다. 나이가 들면 무뎌지고 둔해져서 좀처럼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경계할 것! 빳빳하게 말라서 거친 타월은 되지 말자.


8/20


    요즘은 차를 내리기도 성가시다. 아침저녁으로 냉침을 한다. 찬 물을 뒤집어쓰고 냉장고에서 밤을 지낸 차들은 맑고 투명해서 작은 위안이 된다.


8/21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워낙 몸이 잰 편이 아니지만 여름 들어 부쩍 가만히 있고 싶다. 정신 차려보면 앞에 있는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내가 보이는데 뭘 그렇게 바라보나 싶어 사진을 찍어두기도 한다. 그리고는 잊었다가 며칠 후에 다시 살펴보는 사진 속의 사물과 풍경에서 혹시 그때의 시선이 가닿은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 살펴보지만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다. 분명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귀도 눈도 종종 속인다. 유심히 바라보고 귀 기울여 듣는 모습 뒤에 숨어서 나는 어디를 향하는 것일까? 그나저나 과꽃이 유난히 곱다. 귀뚜라미가 노래하는 밤에 볕이 뜨겁던 어느 오후를 생각함.


8/21 


    큰 비가 오신다고 해서 수국은 자르고 과꽃은 그대로 놔뒀다. 십 년 넘게 마당을 끼고 사니 식물들 눈치도 보게 되어 누구는 제멋대로 놔둬야 하고 누구는 잎이라도 만져줘야 하는지 알게 된다.

장미는 그중에서도 사람 같아서 나긋나긋한 어린 시절과 불같은 사춘기를 가졌다. 겁 없는 청장년을 지나 지금은 조금 수그러든 중년이랄까. 잊힐만하면 꽃을 피워 건재함을 드러내고 반가워 다가가면 귀찮다는 듯 꽃잎을 순식간에 화르륵 쏟아내고 고개를 돌린다. 건드리지 말라고, 다가오지도 말라고, 아는 척도 말라고.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오늘 비 온대. 그거나 알고 있으라고.



8/23


    잠 깬 새벽에, 오늘은 뭔가 다르다고 느꼈을 때, 그러니까 숲에서 시작한 매미소리가 열어둔 창문 틈으로 들어와 작은 방을 채웠던 이제까지의 아침이 갑자기 지나간 아침들이 되었을 때, 습관처럼 옆에 놓인 책을 펼쳤는데 지난밤에 다 읽어버린 걸 깨달을 때, 밤새 불을 끄지 않고 안경도 벗지 않은 채 잠들었던 걸 알았을 때, 거울 속에서 갑자기 자라버린 머리카락을 발견했을 때, 아침 빵은 꽁꽁 얼어있고 씻지 않은 냄비는 레인지 위에 그대로 놓여있을 때, 커피를 마시고 올리브를 씹으며 아프가니스탄 난민과 부르카를 이야기할 때, 천 개짜리 직소퍼즐 상자 안에서 조각난 고흐의 아몬드 나무를 볼 때, 쓰러진 대파들 사이에서 잠든 고양이들을 볼 때, 늙어가는 오이 아래에서 봉긋하게 올라오는 부추꽃 봉오리를 발견할 때, 옆집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 현관 앞에 떨어져 있는 택배 봉투를 뒤늦게 발견할 때.


8/24


    세탁실 문을 열어놓았다. 날벌레들이 들어올까 겁이 나서 평소에는 하지 않는 행동이다. 매미 소리가 나무 사이를 채우고 숨어있는 꽃잎의 작은 틈까지 메우는 햇볕을 보고 있자니 묘한 안도감이 드는 덕분이겠지. 말을 하면 오히려 망쳐버릴 것 같아서, 침묵하는 편이 더 많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 서랍 깊숙이 이 순간의 완벽함을 넣어두는 기분.


8/25


    꽃은 많을수록 좋다. 고추는 하루에 두 개 정도를 딸 수 있으면 족하다. 대신에 잡초는 가슴이 두근거릴 때마다 이삼십 분 앉은 걸음으로 움직이며 뽑을 만큼 충분해야 한다. 손톱 밑은 진한 초콜릿 색에 무릎 아래는 모기 물린 자국이 촘촘하지만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참견을 해도 땀이 나지 않는 요맘때의 내 뜰은 천국. 루콜라 싹이 이렇게 어여쁘다니요


8/26


    비가 오락가락이다. 이 정도 빗방울 정도야 하고는 나가서 토마토를 송이째 따고 대파를 뽑고 가제보 아래 고양이들과 나란히 앉아서 비 구경을 했다. 잔디는 엉망이고 장미는 헝클어진 마당에 과꽃과 일일초가 무성하다. 파를 다듬는다. 누렇게 시든 겉잎을 떼어내고 뿌리를 자른다. 벌레 먹은 잎이 없나 살핀다. 토마토도 성하지 않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삶도 상처투성이인데 토마토 정도야 하는 기분이 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깝네, 어쩌지 하고 호들갑을 떨었을 게 분명하지만 상처는 아물고 계절은 지나기 마련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대파 세 뿌리 챙겨서 들고 쌀 바가지는 머리에 쓰고 들어왔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8/27


    자동차가 지나는 속도로 계절이 바뀐다. '언덕 하나를 넘으니 거기 가을이 있었다'란 기분이랄까.

가을이면, 가을에는, 가을이 오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 여겼다. 비만 그치면, 조금 더 선선해지면, 그러니까 가을이 오면. 지나고 보니 얇은 커튼 뒤로 숨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네. 빛은 보이지 않는 틈으로 들어와 감춰놓은 것들을 드러내고도 남아서 거기 빈자리에 부끄러워 남루해진 여자를 남겨놓았다.

오렌지빛 잠자리 꼬리에 서러운 여름이 붙어있는 걸 보고 말았다. 이 가을엔 청소를 해야지. 겨울 눈이 사뿐히 내려앉도록.


8/28


    책은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힌다. 그래서 다시 읽는 책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 책장을 넘기다가 귀퉁이가 접히거나 줄을 그어놓거나 색테이프가 붙어있는 페이지를 발견하면 숨겨놓은 비밀을 엿본 기분이 든다. 그런 흔적을 남긴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8월에는 지나치게 읽는 경향이 있다. 경계해야 한다. 떠나지 않았어도 멀리 다녀온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8/30


    며칠 비가 내리더니 마당에 버섯이 돋아났다. 노란색 버섯을 뒤집으면 섬세하고 정교한 주름이 드러나는데 만져보니 생크림처럼 부드럽다. 어떤 버섯인지 모르니 먹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소인국의 초가집들처럼 귀여워서 그대로 두고 일어나는데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아기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졸졸 따라다니는 녀석이다. 나와 버섯을 번갈아 바라보는 폼이 심상찮다. 늙은 오이 두 개와 호박이 담긴 바구니를 내려놓고 다시 쪼그려 앉아 버섯을 땄다. 잔디를 들춰가며 작은 버섯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꼼꼼하게 뒤졌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어. 먹으면 안 되는 버섯일 수도 있거든. 나는 무릎걸음으로 옮겨가며 버섯을 따고 녀석은 분한 표정으로 따라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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