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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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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ug 01. 2022

어쩌면 아름다움을 갖게 될지도 몰라

七月愛

7/1


    오이를 소금물에 담가두었을 뿐이다. 생기를 잃은 오이가 빛이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투명한 몸을 얻을 때까지 기다렸다. 며칠에 한 번 통을 열고 오이가 제대로 잠겨 있는지 확인했다. 소금과 물, 시간을 다룰 줄 알면 오이지를 만들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면 섣불리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 것. 자칫 망쳐버린 오이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7/5


    꽃병의 물을 갈아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한 손으로 꽃다발을 잡고 다른 손으로 어제의 물을 쏟아버리고 오늘의 물을 받아 꽃을 꽂으면 된다. 시든 꽃이 있으면 빼고 줄기 끝을 자를 때가 되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몇 분 안 걸린다. 화병의 꽃을 돌보기가 만만치 않은 이유는 그 일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종종 잊어버리고 말기 때문이고 내가 비난받을 지점도 바로 거기다. 책을 꺼냈다가 다시 책장에 올려두기를 잊고, 쓰고 난 펜의 뚜껑 닫기를 잊고, 그리고 밥하기를 잊고, 잠을 잊고, 아침에 일어나기를 잊고, 그리고 또 꽃병의 물 갈아주기를 잊고. 하루가 저물고.


7/6


    다니카와 슌타로의 [살다]라는 시를 처음 알게 된 건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한 장면에서였다. 고이치가 교과서를 읽다가 주저앉는 장면에서 읽던 시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새는 날개짓한다는 것
바다는 넘실댄다는 것
달팽이는 기어간다는 것
네 손의 온기
생명이라는 것
                                                                       <살다> 중에서


시의 원문을 찾다가 그림책을 찾았다. 시는 그림책 맨 뒤 두 페이지에 있다. 시를 몇 번 읽다가 슌타로가 사노 요코와 부부였을 때 함께 쓴 책이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처음 읽었을 때 기묘한 이야기군 했다가 뒤에 숨은 슬픔과 아름다움과 어쩔 수 없음을 발견했다. 사노 요코는 시인의 마음을 가진 화가이자 작가이고 다니카와 슌타로는 아이 때 이미 늙어버린 시인이다. 그들이 오래 함께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불어 기적은 매일 일어난다.


7/9

    가끔은 머리를 비우고 가슴도 비우고 멍하니 있는 것도 좋다. 거울 속 얼굴이 낯설어지면 공연히 서랍을 뒤진다. 손에 잡힌 작은 물건들에 이야기를 덧입히는 건 휘청거리는 몸을 곧추 세우는  방법이기도 한데 이번에는 은방울꽃 모양을 한 종이 클립과 엄마의 진주 목걸이다. 손가락이 부어 반지는 빼놓고.


7/13-아침


    바질 특유의 달콤함이 점차 줄어들고 싸한 향기가 나기 시작하면 장마도 끝나간다는 뜻이다. 올해는 예년보다 빠른 듯 하지만 미적거리다가는 때를 놓칠지도 모르기에 과감하게 뿌리째 뽑아서 다듬었다. 진한 향기가  아찔하다. 잎을 씻어서 물기를 거두고 마늘 껍질을 벗겼다. 잣을 팬에 볶아 노릇하게 굽고 치즈를 곱게 갈았다. 믹서에 넣고 페이스트가 될 때까지 갈면 끝이다. 진하고 선명한 초록색 바질 페스토가 두 병, 한 병은 엄마에게 보내고 한 병은 냉장고에 넣었다. 양이 적어서 아쉽지만 때를 놓치지 않은 게 어디냐 싶다. 요즘은 그렇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제대로 해내기가 쉽지 않아서 끝내고 나면 스스로 대견하고 기특하다. 삶을 정확하게 읽고 싶다.  매일을 체로 거르거나 키질을 해서라도 뼈만 남기고 싶다. 내가 부여잡고 싶은 것은, 그러니까 바로 오늘의 정수라고 여기는 건 바질 페스토를 만드는 날의 바질 페스토, 그러니까 ‘바질 페스토 다움’이다. 매일의 ‘다움’을 조금씩 모아 보면 훗날 내게 걸맞은 ‘아름다움’이란 걸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산다.


7/13-밤


    두부 반 모 남은 것, 댕강 짧아진 당근, 동그란 호박 반 토막, 시든 채소들은 가장자리를 찰나 내면 다시 싱싱한 척을 한다. 남은 것들을 모아 넣고 된장찌개를 끓인다. 요즘에는 그런 것들이 좋다. 조금 남아 있는 것들을 털어 비우는 것. 그것들이 들어있던 봉지나 용기를 텅 비게 하는 게 좋다. 지퍼백에 들어있던 고추 두 개를 다 쓴다. 바닥이 보이는 간장병, 몽땅 쏟아 붓기에는 조금 많다 싶은 참기름, 맛술을 모두 붓는다. 그 빈 병들을 버리고 싶어서다. 간장도 참기름도 그래서 제 양보다 넉넉하다. 오늘은 더 맛있겠네. 이게 마지막이야 하면 더 맛있어진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하면 오늘이 더 행복해질까.


7/14


창문은 벽에만 난 게 아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

울타리 너머,

의자 밑을 들여다보라.

거기 또 다른 세계로 난 창문이 있다.


7/17


    살짝 눈물이 났어. 고개를 들고 천장을 노려보며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렸지. 느닷없이 만나는 소나기. 눈을 감아버리게 만드는 따가운 햇볕.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밀려오는 삶의 무게. 바람개비를 돌려 모두 날아가 버리게 할 수는 없을까? 그렇지. 사실을 바꿀 수는 없어도 다르게 생각해 볼 수는 있지. 그러면 죽었던, 죽을 뻔했던 것들이 다시 살아나지. 기억해. 책 속의 이야기를.


7/18


    마당에 토마토 서너 그루를 심어놓고 일 년 내내 토마토 타령이다. 모종을 심고 곁순을 따고 덩굴을 올릴 때마다 끙끙거리면서 이렇게 저렇게 주문을 한다. 꽃이 피고 동그랗게 토마토가 열리고 이윽고 붉어지면 내 속에서 토마토 피클, 소스, 수프, 주스, 샐러드가 춤을 춘다. 곧 토마토가 열릴 거니까, 토마토는 역시 제철에 먹어야지, 봄을 지나 여름이 오면 토마토가 쌓여있는  매대를 지날 때마다 '나는 집에 토마토가 있으니까' 그대로 지나친다. 마치 '내게는 가시가 있어!'라고 하는 장미처럼. 토마토로 무얼 할까 궁리하는 오후, 사실은 가난하지만 부자인 척하는 사람. 토마토 인간.

7/19


   나갈 때마다 들여다보게 되는 고수. 꽃이 필 때까지는 매일 보러 나가다가 꽃이 질 무렵부터 시큰둥했다. 남편이 씨를 받겠다고 웃자라 휘어진 줄기를 묶어주던 걸 본 기억이 난다. 오늘 초록색에서 갈색으로 변해가는 동글동글한 열매를 보고는 어디서 봤더라? 오래전 처음으로 허브를 모으던 때 이름도 예뻤던 코리앤더! 제이미가 절구에 넣고 빻던 구슬처럼 귀여운 열매가 생각났다. 반가워서 안녕! 하고 인사를 했네. 살짝 가을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7/22





    저녁 먹고 커피 사러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순진무구한 달을 보았다. 하늘도 달도 종일 제자리를 지키다가 이곳에서 나를 만났을 것인데, 저들의 맑음은 어디에서 올까? 앙상하고 긴 손가락을 가진 할머니가 되고 싶지만 부기가 빠지지 않아 며칠 전 뺀 반지는 아직도 거울 앞에 그대로 놓여있다. 더위를 핑계로 넘어가는 것도 개운치 않다. 살이 쪘나 의심하다가 아무래도 날이 너무 더우니까 하고 뻔한 거짓말을 하는 밤.










7/23


    비는 계속 내린다. 홈통을 부딪고 흘러내리는 빗소리가 힘차다. 밖은 물안개에 잠겨 어둑하고 희미하다. 울타리 콩이 생겼으니 남은 야채 모아서 라따뚜이 한 냄비를 끓인다. 된장과 화이트 와인이 빚는 맛은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데 오랫동안 뭉근하게 끓이므로 주룩주룩 빗소리를 들으며 만들기도 먹기도 괜찮다. 와인을 열다가 코르크 마개가 부러지는 불상사가 생겼고, 냄비에 반 컵을 붓고, 한 잔 마셨다가 어지러워서 넘어질 뻔했다.


7/24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책을 손에 넣었다. 폭 4 미터, 길이 16 미터의 작은 집 이야기, [작은 집]이다, 옥상에는 풀밭이 있고, 개와 고양이를 위한 개구부가 있고, 가로 11 미터의 창이 있는 집, 그만큼 섬세하고 대담한, 작지만 호사로운 이 집은 르 코르뷔지에가 부모님을 위해 레만 호숫가에 지은 집이다. 그의 어머니는 이 집에서 36년 동안 홀로 살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집'이라고도 불린다. 십 년 전쯤에 나카무라 요시후미의 [집을 순례하다]에서 이 집을 처음 보고 반했던 건 집의 구조나 설비가 아니라 호숫가 풍경을 마당의 담장에 만든 창으로 끌어들이거나 담장이 끝나는 곳에 갑자기 나타나는 호수의 전경 같은 부분이었다. 적당히 가리고 대담하게 드러내는 것, 필요한 모든 것은 단지 불필요한 것들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는 걸 배운다. 글만 읽는다면 끝까지 읽는데 십 분도 안 걸리지만 난 이 책을 산 몇 달 전부터 여전히 읽고 보면서 기쁘다. 중요한 걸 포기하지 않고, 옳다고 여기는 걸 양보하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드는 용기를 배우는 중이다.


7/25


    한동안 색색의 채소를 써는 일의 즐거움을 잊고 있었다. 수북하게 자란 잡초를 뽑을 때마다 뿌리에 딸려 올라오는 흙냄새가 얼마나 기운을 나게 하는 건지도. 대충, 겨우, 어찌어찌 먹고 치우고, 그러면서 그게 그리도 슬프더란 말이지. 생각해보면 물 한 모금 마실 잔에도 까탈을 부리며 살았었는데. 한 꺼풀 벗어버린 듯 개운한 느낌이 참 오랜만이다.


7/26


    목수국이 피었다. 알록달록한 봄의 수국과는 달리 여름의 목수국은 키가 크고 잎은 갸름하다. 꽃은 연두색으로 작고 귀엽게 피었다가 하얗고 청초하게 성숙해진다. 목수국이 만든 그늘은 특별하다. 꽃이 만든 그늘 아래 손을 갖다 대면 어쩐지 내 손도 그렇게 희고 맑게 변할 것 같다. 목수국이 핀 칠월의 마당은 다정하다. 그 마당에서 나는 갑자기 그동안 내가 뭘 못 보고 살았는지 궁금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가 그리운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디로 갈 수 있는지, 누구를 웃게 하고 누구를 울게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7/27


     노을 같기도 하고 새벽 같기도 한 꽃들이 있다. 어제 본 꽃 들인데도 오늘 또 놀랍다. 산비둘기와 꾀꼬리가 아침부터 운다. 매일 아침마다 같은 아이들일까 생각한다. 그러다가 올해 소쩍새가 왜 오지 않았을까 생각하곤 하는데 언제부턴가 식기세척기 돌아가는 소리가 소쩍새 울음처럼 들린다. 아마도 접시들이 물줄기를 맞으며 서로 부딪는 소리일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소쩍새가 식기세척기 안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내가 만든 상상으로 마을을 짓고 다리를 놓는다. 살다 보면 그런 게 있다. 그립고 보고픈 사람, 아쉽거나 아픈 기억들은 그대로인데 나는 그것 혹은 그들이 사라졌다고, 혹은 잊었다고 착각을 한다. 겁이 많아 마음이 불편한 걸 견디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소리 없이 다가와서 고요와 평온을 한 움큼 내려놓는 밤은 얼마나 고마운가. 보고도 못 본 척 묻지 않는 이는 또 어떻고.


7/30


    한여름, 날은 밝지 않았지만 매미들은 조금만 있으면 멀리서 떠나온 햇빛이 도착하리란 걸, 그리하여 곧 숲을 희붐하게 밝히리란 걸 알고 있다. 조심하거나 배려하는 건 매미들의 본성은 아니겠다. 훈련된 병사의 기민함이든 완벽을 위한 집중이든 그들에게는 공기를 흔들어 새벽의 고요를 깨트리는 지휘자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숲을 꽉 채운 매미들이 동시에 울음을 멈출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찾아온 정적에 비로소 잠을 깨는 아침은, 읽던 버지니아울프를 덮을 때마다 찾아오는 생경함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소란한 장터를 벗어나 서늘하게 그늘이 내려앉은 골목으로 접어들거나 혹은 어둡고 푹신한 음악감상실의 두꺼운 문을 열고 화살처럼 내리 꽂히는 햇볕 아래로 나선 기분이다. 아주 작은 은스푼으로 팥빙수 아래를 야금야금 퍼올려 먹듯이, 혹시 눈처럼 흰 얼음산이 녹아내릴까봐 아끼고 조심하면서 읽었다.


 작가는 다른 어떤 분야의 예술가 보다도 비평가가 되어야 합니다. 언어는 워낙 일상적이고 친숙한 것이라 정말로 영구적인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채로 치고 망으로 걸러야 하기 때문이지요. 매일 글을 쓰십시오. 자유롭게 쓰십시오. 하지만 우리가 쓴 것을 항상 위대한 작가들이 쓴 것과 비교해 봅시다. 굴욕적이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뭔가를 남기고자 한다면, 창조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버지니아울프 '기우는 탑' 중에서


7/31


    어서 오세요. 팔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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