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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l 13. 2023

이 글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아

리디아 데이비스, 불안의 변이

  다쳤다. 그 일은 월요일 아침에 일어났다. 한쪽 면이 벽에 붙어있는 침대의 퍼가 조금 밀려내려온 것처럼 보였던 게 탈이었다. 퍼를 벽 쪽으로 조금만 밀면 침대가 단정하게 정리될 듯했다. 양팔을 토퍼 아래로  밀어 넣어 살짝만 들어올리면 가볍게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퍼가 움직이는 대신 낯선 감각이 온몸에 퍼졌다. 숨어있던 벌집이 터져버린 것처럼 무수히 작은 벌들이 허벅지를 지나 종아리를 타고 발끝으로 내달렸다.


  [불안의 변이], 598쪽. 리디아 데이비스의 사막 같은 문장을 몇 페이지 읽다가 옆으로 밀어 놓은 게 며칠 전이었다. 그건 내가 어떤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데 그 사실이란  글을 제대로 읽으려면 어떤 준비, 이를테면 읽는 내 얼굴에 드러날 표정의 변화를 알아챌 이가 없는 장소, 느닷없는 방해로 읽기가 중단되지 않을 만큼 충분한 시간, 무엇보다 처음 만나는 작가에게 터무니없이 사로잡혀 휘청거리지 않을 정도의 빗장 지르기 같은 것들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야 사막의 모래언덕 뒤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아름다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당혹하고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늦은 오후에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어쩔 수없이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앞으로 며칠 동안은 꼼짝없이 동침대 신세를 져야 할걸 알았을 때, 씻는 건 고사하고 식탁에 앉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님을 알았을 때, 생각보다 오래 아프면, 어딘가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이 생겼으면 어쩌나 불안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을 때 밀어놓았던 그 책을 다시 잡은 건 해가 진 후 어둠이 내려앉은 마을의 집들에 불이 밝혀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02 편의 이야기가 있다. 제각각인 분량, 형용사와 부사 사용의 절제, 이중 삼중 부정의 집요함과 모호함이 낯선 동시에 익숙했다. 이야기는 금방 끝나고 또 결코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때로 한 순간을, 때로는 인생 전체를 이야기하는데 사실 모든 글에서 작가가  하는 말은 같다. 살아있음의 기적,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간다는 사실. 읽는 동안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 게 가능하다면 데이비스의 글은 어느 바닷가에서 발견한 하얀 뼈 같은 것. 마음에 담아둔 줄도 몰랐던 오래된 낙담과 포기, 살아가는 이들의  뒷모습이 얼마나 닮았는지를 눈이 부셔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리하여 나는 버지니아 울프처럼 이 글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아'라고 중얼거렸다. 거센 비가 쏟아지는 여름밤에 한쪽 다리를 쿠션에 올린 채 누워서 방금 읽은 단어들이 '투명하게'변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정확한 글을 썼다고 느낄  때 찾아오던 감각, 기이하고 슬픈 희열이 거기 있었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1947 년생이고 1976 년에 첫 작품집을 냈다. 작가이자 번역가로 2013년 맨부커상을 수상했고 플로베르와 프루스트를 번역한 그는 폴 오스터의 첫 번째 아내였다. [불안의 변이]는 작가가 이십 대부터 육십 대에 이르기까지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작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있지만 물론 일기나 회고록은 아니다. 평범한 일상  속 결혼, 육아, 늙어감, 질병, 애도를 다룬 100개가 넘는 글에서 지나온 순간들의 나를 본다. 나는 몇몇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었고 심지어 어떤 글들은 직접 쓴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무심을 가장한 영리한 유머'덕분에 내 안의 모순과 착각, 불안과 집착, 포기와 기만이 부끄럽지 않다.


  걸을 수 있다 해도 허리에 손을 얹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게 고작이다. 몸을 구부릴 수 없어 의자에 앉는 것도 어렵고 씻을 수도 없다. 밥도 지을 수 없다.  남편과 아이가 끼니를 준비하는 소리를 듣다가 난간을 붙잡고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가서  앉고 서기를 반복하며 식사를 한다. 새삼스럽게 밥이 내게 무엇인가 생각했다. 가장 하기 싫고 어려웠던 일이었던 동시에 제일 잘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밥을 짓는 대신에 좋아하는 뭔가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예전 같으면 식구들 밥 걱정을 했겠지만(혹시 걱정하는 척을 한 건 아닐까) 이제는 내 배 고픈 생각이 먼저 든다(혹시 항상 그래왔던 건 아닐까). 리디아 데이비스라면 벌써 눈치챘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고 '덕분에 '와 '탓에'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여자의 마음을.


  누워있으니 보이는 건 천장, 높은 창으로 비스듬히 보이는 하늘이 전부다. 두 팔은 자유로이 쓸 수 있으니 반듯이 누워서도 책을 읽고 스마트폰을 열어 글을 다. 어떤 자기 인식은 되돌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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