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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Oct 03. 2023

호미

박완서


   수필집 [호미]를 읽으면 허기가 진다. 메밀 칼싹두기를 기억하는 부분을 읽다가 수제비를 끓이거나 호박잎과 강된장 이야기를 읽은 후 곧바로 장에 간 적이 여러 번이다. 작가가 기억하는 칼싹두기는 거칠게 간 메밀가루를 대충 반죽해서 방망이로 밀어 칼로 썬 후에 맹물에 끓여낸 음식이라고 했다. 양념장을 곁들이지도 않고 꾸미를 얹지도 않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럽고 무던하고 구수한 메밀의 순수를 간직한 맛이라는 문장에 솔깃했다. 봉평에 갔을 때 사 왔던 메밀가루를 기억해냈다. 적당량의 물을 넣어 반죽을 한 후에 밀대로 밀었다. 국수 모양이 나게 썰어서 소금 간을 한 맹물에 넣고 끓였다. 책에는 약간 걸쭉해진 국물과 함께 퍼담으면 그만이라고 했으니 어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끓인 국수는 힘이 없어서 뚝뚝 끊어지고 소금을 약간 넣었을 뿐인 맹물은 걸쭉한 만큼 텁텁했다. 비 오는 날, 벽촌의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서 어린 날의 작가가 느꼈던 적막감의 기억 없이는 메밀 칼싹두기의 맛이 완성될 수 없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칼싹두기의 순정한 맛은 내 몫이 아니었다.


  [호미]를 읽을 때마다 몸과 마음이 햇살에 달궈진 담벼락에 기대앉은 듯 풀어지는 것은 이곳저곳에서 작가와 나의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나무와 꽃과 흙에게 말을 거는 버릇이 있다. 모질게 군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씨앗을 뿌릴 때는 흙을 토닥이며 말을 건다. 싹이 트면 반갑다고, 꽃이 피면 어머머, 예쁘다고 소리 내어 인사한다.


꽃이 한창 많이 필 때는 이 꽃 저 꽃 어느 꽃도 섭섭지 않게 말을 거느라, 또 손님이 오면 요 예쁜 짓 좀 보라고 자랑시키느라 말없는 식물 앞에서 나는 수다쟁이가 된다.
(중략)
왜 안 피냐고 독촉하면 곧 피고, 비 맞고 쓰러져 있으면 흙을 돋워 일으켜 세우면서 바로 서 있으라고 야단치면 다시는 넘어지지 않는다.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 중에서


   꽃이나 나무에게 말을 거는 것은 비슷하지만 나는 주로 잔소리를 해대고 공갈협박을 일삼느라 작가와는 격이 다르다. 이른 봄부터 조바심을 내다가 기다림에 지치면 당장 나오지 않으면 파 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고, 꽃 빛깔이 곱지 않거나 흐드러짐이 지나치면 집 밖으로 내쫓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꽃들이 작가의 말을 잘 듣는 것은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만 표현만 다를 뿐 나도 노랗게 피는 꽃한테 빨갛게 피라거나, 아침 한때만 피는 꽃에게 온종일 피어 있으라는 주문은 하지 않는다. 혹시 우리 집 아이들은 표현에 예민하고 성정이 우아해서 거친 나의 말버릇에 반발하는 것일까?


  [호미]는 작가가 마당 있는 집에 살면서 꽃과 나무를 기르고 동네를 산책하는 일상을 세심하게 담았다. 그대로 지나치면 못 볼 것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예의가 놀랍다. 유년 시절의 고향을 추억하며 그리운 이들을 기리고 자신의 몸에 각인된 맛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책의 후반부에는 글 쓰는 이로서 만난 문필가와 예술가들에 대한 짧은 회고들도 실려있는데 그 글들을 읽다 보면 작가로서 산다는 것에 대한 당신의 마음가짐과 세상을 향한 시선이 얼마나 올곧고 단정했는지 마치 맑은 시냇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명쾌하다.


  2007년에 출간된 이 책을 2011년에 구입해서 여러 번을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새롭게 튀어나와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부분이 다르다. 보통은 지루한 겨울에 슬슬 지쳐갈 즈음 마음을 달래려고 읽기 시작해서 웃다가 울면서 봄이 무르익어 지나갈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곤 하는데 올해 벌써 손에 들고 있는 건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데 그 이유가 있음이라. 잎이 다 떨어진 목련에게 말을 거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첫 글을 읽으면서 이 책이 정말 잘 어울리는 시기는 겨울이란 걸 깨닫는다.


 뭐니 뭐니 해도 [호미]에서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건 글 쓰는 일에 관한 일갈.

그래도 그렇지요. 그 연세에 어떻게 진지를 손수 해 잡숫냐고 상대방의 동정심은 수그러질 줄을 모른다. 그럼 나는 조금 화가 나서 아니 내가 글도 쓰는데 그까짓 밥을 왜 못 해 먹느냐고 짜증을 내고 만다. 밥 하고 반찬 하는 건 손에 익으면 쉬워지지만 글 쓰는 일은 생전 해도 숙련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음식이야기> 중에서


그리고,

먹는 일에 대한 자세.

나는 맛있는 걸 먹고 싶은 건 참을 수 있지만, 맛없는 건 절대로 안 먹는다.
                                                                              <음식 이야기> 중에서


                     



   브런치북 [문숙만필]을 발행했습니다.

  순간과 영원은 등을 맞대고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방과 손바닥만한 마당을 오가면서도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으니 다시 오지 않는 순간들을 아쉬워하는 대신 기억하고 간직하기 위해 글로 옮겼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영원은 종종 순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을 잡아 챈 짧은 글 18 편과 순간에서 비롯된 긴 이야기 12 편을 골랐습니다. 4 권의 수필집을 출간한 후에 쓴 글들을 묶음으로써 한 시절의 자신에게 안녕을 고하고자 합니다. 종종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욕심을 잠재울 '쓰기' 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책상정리를 하는 기분입니다. [문숙만필]이란 표제는 황인숙 시인의 [인숙만필]에서 따온 것입니다. 시인이 [인숙만필]이 '마음 내키는 대로 쓴, 우스꽝스러운 글'이라고 쓴 것처럼 [문숙만필] 역시 '형식이나 체계가 없이 느끼거나 생각나는 대로' 쓴 글입니다.


  맵고 짜지 않으면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깃발을 휘날리고 나팔을 불어 바람을 일으키지 않으면 눈길을 끌 수 없는 요즘 세상이지만 메밀 칼싹두기처럼 밍밍하고 따뜻하여 잠시 기대어 눈을 감고 쉴 수 있는 글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입니다.  


브런치북 [문숙만필]

https://brunch.co.kr/brunchbook/moonsukstory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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