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 앞에 택배상자가 놓여있다.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정리하는 것이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인 때가 많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식재료, 냉동식품, 욕실용품까지 한 번에 구입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편리하다. 잠시나마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건들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 그뿐인가. 외출준비를 할 필요도 없고 꽉 막힌 도로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된다. 한밤중에 침대에 누워서 쇼핑을 해도 다음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내가 선택한 물건들이 도착한다. 온라인 쇼핑이라고 하면 알라딘 정도밖에 이용하지 않았던 몇 년 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그뿐만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속해 있는 문학회에서 연락이 왔다. 교류하고 있는 해외문학회와 화상회의가 있으니 사무실로 오라기에 참석하기 어렵다고 했더니 줌(zoom)으로도 가능하다며 연결코드를 보내겠다고 했다. 회의가 열리는 시간까지 집에 돌아올 수가 없어 그도 어려울 것 같다고 하자 스마트폰으로도 연결할 수 있다는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진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상대방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며 항복하고 만다.
“스마트폰이 세상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네! “
스마트폰으로 사람들과 연락을 한다. 음악도 듣고 영화를 본다. 쇼핑은 물론 회의도 가능하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스마트폰 한 대만 있으면 세상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스마트폰이 하는 일은 우리에게 세상을 가져다주는 대신 세상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의 저자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지적이다. 그의 말대로 실재하는 세상을 외면하고 스마트폰 속에 머문다 해도 문제는 없어 보인다. 휴대전화의 본래 기능은 바로 '연결'이었다. 이제 우리는 다른 대륙에 있는 낯선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느라 곁에 있는 이들과 소원해진다. 나란히 앉아서 각자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는 연인들을 보는 게 어렵지 않다. '연결'을 위해 대화를 멈춘 이들 중에는 나도 있다. 휴대전화가 우리들을 지배한다. 알람이 울리면 감전된 듯 손이 떨린다. 무슨 일일까? 누구일까? 살아 있는 실감,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당장 확인하지 않으면 삶을 바꿀 수 있을 기회를 놓치기라도 할 듯 서두르지만 다음 순간 멋쩍게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할인행사 시작 시간을 알려주는 동네마트 아니면 택배가 도착했다는 알림일 뿐이다. 시간 맞춰 영화관에 가고 차를 갈아타며 모임에 참석하고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오가는 대신 휴대전화를 쥔 채 집에 머무는 우리들은 예전보다 행복한가.
어린 시절 오후의 볕이 툇마루에 내려앉으면 엄마는 오늘 저녁은 뭘 먹나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다가 시장에 가볼까 몸을 일으키면 나는 놀이터에라도 가는 양 신이 났다. 단골 가게들을 들른 뒤 올망졸망한 바구니들을 앞에 늘어놓은 할머니들 앞을 지났다. 엄마는 미리 정하지도 않고 장을 봤다. 물이 좋은 생선을 구하는 날도 있었고 낯선 채소가 눈길을 끄는 날도 있었다. 나는 엄마를 따라간 시장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걸 발견하는 기쁨과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을 배웠다. 시장에서 계절이 오고 가는 걸 실감했다. 살맛이 나지 않으면 시장에 가보라는 말을 하던 시절이었다. 엄마의 일상은 나의 그것보다 설렘이 많았다. 무엇보다 진짜였다. 만져보고 냄새 맡는 기쁨이 있었다.
이제 그때의 엄마보다 나이가 더 든 나는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가는 것보다 더 자주 핸드폰으로 장을 본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식재료, 화장품, 청소용품까지 한 번에 구입할 수 있다. 무거운 장바구니 대신 핸드폰만 있으면 된다. 외출할 필요도 없고 허탕을 칠 염려도 없다. 잠들기 전에도 다음날 아침식사용 샐러드를 주문할 수 있다. 집안 대소사나 이런저런 모임, 정기검진 날짜를 잊을 염려도 없다. 비가 내릴 테니 우산이 필요하다고, 누군가 길을 잃었으니 우연히 보게 되면 신고해 달라고, 아이가 학교에 도착했다고, 멀리서 보낸 소포가 배달될 거라고, 몇 분 후에 주문한 음식이 도착할 거라고 미리미리 알려준다. 시시때때로 울려대는 알람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앱을 열어 영화를 예매하고 기차표를 사고 식당예약을 한다. 모두가 핸드폰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핸드폰의 힘을 키웠다. 집에 있으면 마스크를 쓰거나 출입명부를 작성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서로 다가가지 않는 것이 미덕인 시대였다. 재택근무와 재택수업, 온라인쇼핑은 내가 원한 게 아니라 상황이 강제한 것이었다. 만남은 미뤄지고 조금씩 더 게을러졌다.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어쩐지 삶이 조금 느려진 것도 같았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다고 했던 사람들은 팬데믹 사태가 끝났을 때 당황했다. 강제가 없어진 곳에 선택의 부담이 들어섰다. 다시 주어진 자유는 불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도 충분한데 왜? 인터넷이 있잖아! ‘자유로운 시간은 악몽이 되었다’.
재앙은 끝나지 않는다. 펜데믹, 전쟁, 기후위기에 관한 뉴스가 넘쳐나는 세상에 지친 사람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보통의 날을 꿈꾸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도 고단하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별다를 게 없을 게 눈에 보인다. 간간이 들리는 위층의 소음, 자질구레한 불안과 가벼운 충돌도 버겁다. 이런 날들이 끝도 없이 단조롭게 덧붙여지는데 여기에 자기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피로가 추가된다. 저자는 이를 ‘현대적인 피로’라고 썼다. ‘제자리에 있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달려야 하는’ 삶은 주어진 게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건 평정심이나 차분함이 아니라 진짜 사건, 자신을 벗어나는 경험이다. 현명함 대신 가벼운 광기, 영적인 치료제가 아니라 짜릿한 도취’가 필요하다. 팬데믹을 경험한 우리가 정말로 배웠어야 할 건 손을 제대로 씻어야 한다는 것에 더해 ‘죽음 이전에 진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파스칼 브뤼크네르가 걱정하는 것은 작은 방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이 시대에 익숙해진 인간들이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위장된 평온으로 자신을 감싸고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고 감금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책의 어디쯤에서부턴가 스스로 만든 세계가 완벽하다고 느낄수록 그 세계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서 권력에 지배당하고 작은 방에 갇혀 세계가 점점 넓어지는 환각에 취한 자신을 들여다보는 건 놀랍다. 삶은 휴대전화와 온라인 쇼핑과 인터넷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자유와 선택과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외면했던 자신을 발견하는 낭패감, 그리고 막막하고 불안해하면서도 자유 앞에 선 자신을 발견한 기쁨!
익숙한 작가들과 문학작품들이 등장한다. 제임스 조이스와 캐서린 맨스필드, 버지니아 울프, 아니 에르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이름이 나란한 문장을 읽는 즐거움이 있다. 책을 읽는 동안 휴대전화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속도감 있는 독서가 가능하다. 흐르는 강물처럼 유려한 문장들이 단정하기까지 하다. 철학이 하는 일이 우리의 삶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그 정의에 부족함이 없다. 그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선택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표지 사진은 구글에서 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