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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Oct 21. 2023

걷기의 즐거움

수지 크립스


   박완서는 수필 <나의 환상적 피서법>에서 여름에 혼자 집에 남아 있어 보면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어도 시원하다고 썼다. 이웃집에서도 인기척이 들리지 않으면 약간은 고독하겠지만 고독처럼 산뜻하고 청량한 냉기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텅 빈 집에 홀로 있으면 시원하기야 하겠지만 방해받지 않는다는 만으로 온전히 털어낼 수 없는 ‘무엇’이 우리 위에 여전히 그늘을 드리울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집안에서 홀로 있다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 않은가.


   버지니아울프가 <런던 거리 쏘다니기>에서 말하듯이 내 방의 물건 하나하나에는 내가 들어있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왔던 익숙한 사물들이 집안 곳곳에 놓여 있다. 물건마다 내가 들어있다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나와 함께 지내는 걸까? 의자 등받이에 항상 걸쳐져 있는 낡은 카디건과 하루에도 수십 번은 바라보게 되는 벽시계, 창밖으로 보이는 목련과 장미 덤불까지, 낯익은 것들에 눈을 감아 봐도 소용이 없다. 내게서 온전히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피부처럼 익숙해진 집에서 나가보기로 한다. 집 앞 골목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다만 이곳에서 사라지기 위해서다.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어쩌면 나 자신으로 보일 수도 있는 카디건을 벗어버리고 나도 모르는 내가 되어보기로 하는 거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은 여기에 남겨둔다.‘나도 모르는 나‘는 바로‘아무도 아닌 사람’이다. 이름도 없고 어쩌면 형체도 없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머물던 곳과 사로잡혔던 모든 일과 생각들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하여 홀가분해지는 것.  그게 '걷기'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서면 우리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 부서진다. 아침마다 식탁을 차리고 식구들을 깨우는, 마당의 고양이들에게 다가가 야옹거리는 내가 갑옷처럼 뒤집어쓰고 있던 ‘나’라는 껍질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 껍질을 우리 영혼이 그 안에 들어 살기 위해,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갖기 위해, 자기 분비물로 만들어낸 외피라고 불렀다. 이 외피는 집 밖으로 나가면 금세 부서져버린다. 껍질을 벗어버린 나는 몸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눈처럼 되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받아들인다. 홀로 거리를 걸으며 내가 아닌 채로 또 다른 내가 된다.



  [걷기의 즐거움]은 바로 그 ‘걷기’에 관한 글들을 모았다.  17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걷기’라는 주제를 다룬 시와 에세이, 그리고 소설 속의 장면들을 모았다. 엮은이 스스로 언급하듯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걷기는 대개 백인 남성 위주의 활동’이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 이사를 한 블룸즈버리에서 매일 홀로 산책을 다닐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도시를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산책은 새로 얻은 자유였다. 그 이전까지는 거리에서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던 건 비교적 부유한 남성들뿐이었다.


   리베카 솔닛이 [걷기의 인문학]에서 "왜 여자들은 나와서 걸어 다니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로런 엘킨이 역시 [도시를 걷는 여자들]의 서문에서 플라네리(산보)란 단어를 얘기하면서 플라뇌르(남성)란 단어는 있는데 플라뇌즈(여성)라는 단어가 없다는 걸 발견하고 믿을 수 없었다는 표현을 쓴다. 걸어 다니는 기쁨이 성별에 따라 다를 리가 없는데 말이다. 버지니아가 대영 박물관에서 여성들에 관해 제대로 쓰인 책들을 발견할 수 없었던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산책하는 여성들은 매우 희귀한 존재였다. 19세기 여성들이 쓴 글을 보면 당시 부르주아 여성은 혼자 집 밖으로 나가는 바로 그 순간에 평판이 손상되고 명예를 잃을 위험에 처한다. 거리에 나온 여자는 말 그대로 거리의 여자, 성매매 여성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비평가들은 말하지만 이런 자료들도 대체로 남자들이 작성했을 것이다. 남자는 남자의 방식으로 보고 쓴다. 걷기에 관해서는 물론 평범한 여성의 생활에 대한 기록도 많지 않다. 책 [걷기의 즐거움]에서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버지니아 울프, 엘리자베스 개스켈, 조지 엘리엇 등을 비롯한 여성 작가들의 글을 발견하는 기쁨이 더욱 각별한 이유다.


  읽다 보면 즐거워진다. 마음 가볍게 읽다 보면 신기하게 몸도 가벼워진다. 걷다 보면 나도 그들처럼 즐거워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래 눌려 납작해진 마음이 몽실몽실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사랑스럽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걷기의 즐거움]이란 제목을 달고 있긴 하지만 [읽기의 즐거움]까지 준다. 덤이라 부르기에 넘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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