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에 갔다. 염색약을 바르던 직원이 엄마와 둘이서 여름휴가를 다녀왔다고 했다. 오래전부터 벼르다가 드디어 갈 수 있었다는 목소리가 탄력 있게 들려왔다. 출발할 때부터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고 휴가지에 도착해서도 무덤덤하던 엄마가 '좋다'란 소리를 한 건 지나던 길가 오두막의 툇마루에 앉았을 때라고 했다. 비용을 많이 들인 숙소와 맛집에서도 별 반응이 없던 엄마가 납작한 집의 툇마루에 앉아서 옥수수를 손에 들고 좋아하던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단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자기도 그때가 가장 좋았노라고, 진작에 엄마랑 여행도 다닐 걸 그랬다고, 나이 든 엄마를 보는 건 가슴에 뚫린 구멍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시렸단다. 갑자기 궁금해진 내가 엄마의 나이를 물었다. 직원의 대답에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는데 그 엄마의 나이가 바로 내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고개만 주억거리고 있는데 염색약 바르기를 마친 그녀가 잠시 쉬고 계시라며 멀어져 갔다.
맞아. 나이 들었지. 한 달에 한 번은 염색을 해야 하잖아. 어제만 해도 그래.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뭐라고 했더라. 제대로 듣지 못한 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더니 다시 한번 말하기를,
'어머니, 이리 오세요.'
아니 내가 왜 당신 어머니야? 생각하면서도 접수대로 다가가 처방전을 내밀고 계산을 하고 기다리는데 기분이 영 별로였잖아.
'ㅇㅇㅇ님, 약 나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는 내게만 들리게 중얼거렸지.
'훨씬 낫네. 나는 당신 어머니가 아니라고.'
지난 가을 몇십 년 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길에서 지나쳤으면 몰라봤을 얼굴들이 많았다. 주름진 눈가, 희끗한 머리카락, 두리뭉실해진 몸, 쉰 듯한 목소리, 늘어진 피부를 하고서 마주 앉은 친구들이 낯설었다. 물론 잠시 후에는 타임 슬립이라도 한 듯 모두들 다시 고등학생이 되어 그때 이랬잖아, 그랬지 하면서 얘기를 주고받았지만 헤어져 돌아 나오면서는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방금 헤어진 친구들과 같은 나이라는 걸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아니 그들과 비슷한 모습일 자신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날 저녁 거울 보기가 겁이 났던 걸 고백한다. 나이 드는 게 반갑지는 않지만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모리 슈워츠는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의 첫 문장으로 삼는다.
내가 고령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처음에는 등골이 서늘하다가 혼란과 우울감이 이어졌다. 그러다 마음을 정리한 다음 '마침내' 안정되고 대부분 사실을 인정했다.
이 책은 노인이 본 노년의 풍경을 다룬다. 사례로 든 노인들은 대부분 8,90대(곧은 아니지만 살아 있다면 우리 모두 언젠가는 가닿게 될)다. 노인의 정체성, 노화의 문제, 노년의 심리, 노년층을 바라보는 사회와 노인 자신들의 시각, 노화의 과정과 삶을 건강하게 영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다룬다고 하지만 '살아간다는 일'에 대하여 그리고 그 일의 끝에 '죽음'이 기다린다는 일에 대하여 잠시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단지 노년에 관한 책이 아님을 금방 눈치챌 것이다. 삶과 사람에 대해 경외감을 지닌 이라면 나이와 상관없이 지녀야 할 인생을 대하는 자세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솔직하고, 현실을 대면하고 받아들이며, 도움을 주고받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경험을 모색하고, 크고 작은 것을 축하하며,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고, 변화가 생긴 '나'를 따라잡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용서하고, 잊고, 먼저 손을 내밀고, 인생을 돌아보고, 마음을 열고, 존중하고, 웃고, 용기를 내고, 관계를 유지하고 가꾸며,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고, 자유를 활용하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챙기고, 긍정성을 유지하고, 진정성을 추구하고, 죽는다는 걸 인정하기. 그리하여 문제들과 타협하고, 잘 나이 들며, 최대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다 보면예상보다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할 것이라는 안도감을 준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려고 계속 노력할 수 있고, 그건 나이 들어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