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6일, 며칠만 있으면 해가 바뀐다. 사실 마지막 날들이라고 특별할 일은 없다. 나는 여느 날처럼 자고 일어나서 물을 끓이고 밥을 지을 것이다. 새해가 와서 바뀌는 게 있다면 첫날의 아침 메뉴 - 빵과 잼 대신 떡국과 김치가 올라가는 - 와 달력과 수첩 정도다. 뭐 하루 전날에는 어수선한 책상과 싱크대 서랍을 정리한다고 수선을 피우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대청소도 아닌 것이 청소하기 전과 후가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나에 관해서만 보자면 예년과 다른 부분이 있기는 하다.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듯이 새해에는 가능한 책을 멀리하기로 했고, 그리하여 핸드폰에서 알라딘 앱을 지웠으며. 새해가 되기 전 마지막일지도 모를 책꾸러미가 오늘 도착했고, 당장 읽지 않으면 꼬박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는 스스로 세운 새해 목표의 달성가능성을 의심하는 중이다. 그게 가능하겠냐고 되물어온 이들은 내가 읽고 읽고 또 읽는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이라 내 말을 듣자마자 한결같이 고개를 흔들며 웃음을 터트렸으니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글쎄 정말 가능할까 의심스럽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를 아는 이들 거의가 고개를 저을 정도로 어려울 게 분명한 새해목표를 세운 이유는 단순하다. 나에 관해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왜 좋아하는지 알게 되면 나를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다. 처음 이 생각을 했을 때 바로 떠오른 건 ‘너, 읽기 좋아하잖아! 다른 뭘 더 찾고 말고 할 게 있을까?’란 질문이었다. 맞다. 나는 읽기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자신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서’란 문장은 ‘왜 읽기를 좋아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맞다. 읽기는 좋다. 하루치 긴장을 풀기에 잠들기 전의 독서만큼 탁월한 처방이 있을까? 지지부진한 일상에서 잠시 떠나고 싶을 때 역시 읽기만큼 확실한 떠남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단지 이것뿐일까? 다만 익숙해서 편안하다는 이유만으로 [댈러웨이 부인]을 거듭거듭 읽는 것일까? 내가 알고 싶은 건 바로 이것, 그러므로 신년의 계획은 읽지 않되 파헤쳐보는 것, 꼭 필요하다면 새 책을 펼쳐드는 대신 여러 번 읽어 책장이 손에 부드럽게 감기는 책을 다시 읽는 것, 특히 버지니아울프를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무엇을 왜 좋아하는지 알게 되면 자신을 알아가는 길이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다. 그리하여 올해가 며칠 안 남은 지금 내가 집중하는 것은 바로 읽기다. 새해가 되기 전에 읽어두고 싶은 책들과 지내는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읽은 책들 중에 [취향 육아]가 있다.
나 역시 오래전부터 엄마였으나 나는 ‘육아’란 단어를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조리원이나 육아서의 세계를 알지 못했던 나는 단지 아이와 함께 살았을 뿐이었다. 신기했고 즐거웠지만 피곤하고 지치기도 했다. 작았던 아이는 이제 나만큼 자라서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제목에 ‘육아’란 단어가 들어있는 이 책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조금 걱정을 했는지도 몰랐다. 나의 지나간 시간들에 사과라도 해야 할 까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의 그것들에 미안한 기분이 들었던 때가 적지 않았기에 말이다. 마르셀 파뇰과 마르셀 프루스트, 내가 좋아하는 두 명의 마르셀이 등장하는 마지막 이야기를 읽을 때까지 내내 기억이 현재를 만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는데 거기 작가가 인용한 황현산의 문장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더 슬프다- 에 그만 마음이 풀려버렸다. 내가 흔들릴 때마다 기둥처럼 붙들고 기운을 차리는 문장이었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서 항상 등이 허전하고 발이 시린 거란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도, 지금 이 시간도 결국 기억이 되어 언젠가의 현재가 될 거란 생각도, 그러니까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아, 다행이다. 이이의 글이 간혹 내가 쓴 것처럼 읽히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구나. 나도 제법 시간을 저축해 왔네. 여전히 내가 누군지 궁금한 내게 작가가 해준 말, 여전히 헤매면서도 지도 한 장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나침반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길을 잃을까 걱정도 하지 않는다고. 그게 바로 내게 안겨진 꽃다발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