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스는 마흔아홉 살, 이혼하고 혼자 산다. 님페아라는 이름의 딸이 있지만 사실 님페아는 그의 친딸이 아니다. 요나스는 일주일에 두 번 요양원에 있는 엄마에게 면회를 가지만 정작 그의 엄마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요나스는 입안에 커다란 사탕을 넣고 굴리듯이 '죽음'을 생각하다가 어느 날 죽을 것을 결심한다. 요나스가 죽으려고 하는 이유는‘불행하다’고 느끼기 때문인데 그 말인즉슨 요나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고, 아무것도 아닌 데다가, 가진 것도 없어서 이미 글렀다고 그래서 이제는 죽을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요나스는 죽어버리기로 결심한 날부터 매일 죽음에 관해 생각한다.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지 궁리하며 매일을 산다.
이웃집 남자에게서 총을 빌리긴 했지만 그 총을 사용할지에 관해서는 아직 미지수다. 거실에서 관자놀이에 총을 쏠지, 침실이나 욕실에서 목을 맬지, 죽을 때 어떤 옷을 입을지, 양말과 구두까지 신어야 하는 건지 고민한다. 요나스는 죽어버린 자기를 누가 발견할지, 혹 충격을 받지는 않을지, 자기가 남긴 물건들을 정리하느라 얼마나 애를 쓸지에 관해서 끊임없이 염려하고 걱정한다. 결국 요나스는 사흘을 더 살기로 하고 이웃집 남자, 스바누르에게 트레일러를 빌린 후 창고정리에 들어간다. 사흘만 있으면 그의 49년 생애를 깔끔히 정리할 수 있다는 듯이.
그때만 해도 자신의 삶이 여태 그런 식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는 걸 요나스는 몰랐다. 요나스는 집에서 죽는 대신 비행기를 타고 전쟁이 방금 끝난 나라의 작은 호텔로 향한다. 짐 속에는 이혼한 전처가 떠준 스웨터와 젊은 시절의 일기장, 죽기 위해 목을 맬 때 필요할지도 모를 공구들과 연장 코드와 변압기가 들어있다. 죽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요나스지만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그가 이미 결정된 죽음을 미루어야 하는 이유는 계속 생겨난다. 딸이 자신의 죽은 몸을 발견하게 될까 봐, 죽기 전에 버릴 건 버리고 남길 건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해서, 죽을 장소로 선택한 호텔의 부서지고 고장 난 설비들을 고쳐주기 위해서, 전쟁 후에 오갈 데 없는 여자들이 모여 살게 될 집을 수리하기 위해서, 그에게 식사를 제공해 준 식당의 출입문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열흘 후에 돌아온다는 여배우를 기다리기 위해서 요나스의 죽음은 계속 미뤄진다.
그가 죽기 위해 찾아간 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쟁 중이던 나라였다. 온 천지는 회색먼지로 뒤덮이고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버렸다. 의사당과 박물관과 방송국, 학교, 도서관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람들은 창백하고 피곤하며 건물 벽은 총알 자국으로 뒤덮이고 사방에 지뢰가 묻혀있다. 이런 곳에 뭐 하러 왔냐는 질문에 그는 죽기 위해서라는 말 대신 휴가라고 짧게 대답한다. 그가 죽기 전까지 묵을 거라 생각한 방의 수도꼭지를 수선하는 걸 시작으로 결국 요나스는 죽지 못하고 ‘미스터 다 고쳐’가 된다.
요나스는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다. 문제가 생겨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만나면 상황을 설명하는 대신 즉시 공구를 들고 삐걱거리는 문을 고정시키고 막힌 수도관을 뚫고 전선을 연결한다.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한 남자가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방법은 말을 잃어버린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일, 샤워기의 꼭지를 열어서 그 안의 모래와 진흙을 헹구는 일, 경첩을 조여서 흔들리는 벽장문을 고정시키는 일 따위의 시시하고 사소한 일들이다. 아이는 말문이 트이고 여자들은 웃음을 되찾는다. 무엇보다 요나스 자신이 죽는 걸 계속 미룰 수도 있겠다는, 어쩌면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죽음을 향해 걷던 이가 삶을 바라보게 되는 걸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요나스는 기적을 이룬 셈이다. 이대로 죽어버리기에는 고쳐야 할 것과 돌봐주어야 할 이들이 아직 너무 많았다.
소설은 요나스의 시점으로 진행되지만 요나스의 눈에 비친 주변 인물들 역시 요나스와 그리 다르지 않다. 요나스에게 총을 빌려준 이웃집 남자, 치매에 걸린 엄마. 친딸이 아닌 딸, 어쩌다가 호텔을 운영하게 된 남매, 돈 벌기에 혈안이 되어 유물까지 훔친 옆방 투숙객, 심지어 이혼한 전처까지 요나스를 궁금해하고 걱정한다.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면 저절로 누군가를 염려하고 궁금해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 방향이 서로 엇갈릴 수는 있으되 그렇다고 해도 그게 인생을 끝장내버릴 이유는 되지 못한다는 것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는 흉터가 있는 사람이 존경받는다는 걸 혹시 알고 있나? 인상적인 커다란 흉터를 가진 사람은 맹수를 똑바로 응시한 사람, 자신의 두려움을 정면으로 응시해서 마침내 승리를 거둔 사람을 의미한다더군.” 호텔 사일런스 p.59
그러나 요나스에게 이 얘기를 한 스바누르는 어느 날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등뼈 옆에 커다란 흉터를 가진 채로. 커다란 흉터나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만큼이나 말없이 무언가 좋은 일을 하는 것도 망가진 이 세상을 제대로 서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건 변변히 내세울 상처 하나 가지지 못한 나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이다. 이제 돌아온 요나스는 하찮은 인생이 꾸역꾸역 이어져나가는 걸 못 참아 그만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을 테지.
오래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흉터 아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어느 겨울 손에 화상을 입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난로에 찰싹 손등이 닿아버렸다. 전후사정은 생각나지 않지만 무척 오랫동안 아팠고 불편했으며 흉터가 크게 남았다. 그걸 본 사람들마다 흉터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했다. 내 손등 위의 흉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간혹 그 사람의 흉터 이야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손등에 흉터가 남아있던 몇 년 동안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어색한 침묵이 찾아오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스무 살이었던 나는 손등에 있던 흉터를 감추는 대신 훗날 혹시 내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면 오른손등에 화상흉터가 있는 여자를 찾으라며 웃곤 했다. 그 웃음이 시간의 힘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아이의 설익은 농담이었던 걸 이제야 깨닫는다. 흉터는 사라지고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다. 이제 내 이름을 잊은 이들은 그 흉터로 나를 찾을 수 없겠으나 어딘가에서 고장 난 세상 한 구석을 수리하며 열심히들 살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