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해서 그렇습니다

유선경

by 라문숙


아침마다 아이를 분당까지 데려다 준 시기가 있었다.

갈 때는 아이와 이야기를 하면서 가거나 그냥 조용히 가지만

아이가 내리고 나면 바로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출발 FM과 함께' 다.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 진행자와 아침에 듣기 좋은 클래식 소품들, 그리고 '문득 묻다'가 있었다. 방송을 듣는 동안에 그날 할 일이 정해지기도 하고 읽고 싶은 책이나 알고 싶은 무엇인가가 생겨나기도 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끝나지 않은 음악이나 이야기에 잠시 차 안에 그대로 머물렀던 시간들도 종종 있었다.

그 프로그램의 작가 '유선경'의 산문집이다.




그만큼 사소하고 새로울 것이 없는 작은 이야기들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근조근 들려준다.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눈이 커지지는 않는다. 읽다가 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이미 아는 이야기인 경우도 많다. 문장도 짧고 그 문장 안에 담긴 메시지도 단순하고 소박해서 생경스럽지 않다. 심심한 듯 지루한 듯 한 장 두 장 넘기다 보면 어느새 다시 깨닫게 된다. 짧은 순간들이 모여 하루가 되고 그저 그런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건 어쩌면 찰나의 순간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세상의 중요한 일들은 작은 가슴과 낮은 목소리를 가진 우리 보통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삶이란 어느 날 갑자기 변한다기 보다는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그렇지만 확실하게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리지만 조금씩 자라고 있는 올리브나무


평생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은 없노라 큰소리치는 사람보다

살다가 이따금 죄의식으로

그림자까지 휘청거리는 사람이 차라리 더 희망적입니다. p.100



남편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고, 나이고 싶을 때가 있고

아내도 엄마도 아닌 나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람 자체가

비합법적인 활동이라도 도모하는 것 같아

선뜻 감행하지 못합니다. p.158



꿈꾸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꿈이라도 꾸었으면 좋겠습니다.

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되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늦은 게 맞지만

그나마 오늘이 남은 인생의 가장 빠른 날이니,

당장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꿈은 성공이나 실패가 아니라,

꾸는 사람과 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엔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가게 돼 있으니까요. p.305



가을 마당의 채송화


몇 년 전에 한 친구가 내게 말하길 '욕 좀 하고 살아라'.

말끝마다 '그럴 수도 있지' 라거나 '아마 그건 이런 뜻이었을 거야', 혹은 '내가 잘못 알아들었나 봐'라고 하는 내가 답답하고 못마땅해 보였나 보다. 한동안 만날 때마다 내게 '욕하기'를 주문하길래 한 번 해봤더니 욕이란 참으로 신기한 명약이었다!

'소심해서 그렇습니다'의 여는 글에 보면 놀랍게도 이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저자가 욕을 했다는 말은 없지만 이 대목에서부터 마음에 들었던 책이다.

그 대목이 어쩌면 심심하고 너무 단정해서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 없는 제법 두툼한 책을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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