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기면 저절로 찾아오는 평온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저절로 알게 되는 문장들이 나를 반긴다.
종이 위에 퇴적된 마음의 지층들이 겹겹 뚜렷하다. 맨 밑에는 20세기 초의 작가가, 그 위에는 번역자와 편집자가 있다. 다시 그 위에 80년대의 독자와 90년대의 독자와 2014년의 독자가 차례로 흔적을 쌓고 있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책은 서점에서도 도서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다 합하면 수만 권도 넘지 않을까. 그러나 마음의 지층이 이런 무늬로 남아 있는 책은 나에게만 있다. 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있다. 시간은 모든 책을 단 한 권의 책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