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5,6년 전에 '풍경과 상처'를 샀다. 그 시기에 굉장히 많은 여행기를 읽었는데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부터 시작해서 니코스 차자차키스의 ' 지중해 기행', '일본, 중국 기행'을 거쳐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으면서 지낸 새벽들이 많았을 때였다. 평소 좋아하는 작가들의 여행 산문집들을 찾아 읽으면서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맞이하는 것 만큼, 혹은 그보다 더 자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짧은 여행들을 홀로 떠나곤 했던 그 시절은 세스 노터봄의 '산티아고 가는 길'과 박완서의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마지막으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서점에 갔다가 '풍경과 상처'를 발견했다. 그전에 김훈의 글을 읽어본 경험은 아이의 국어 교과서에 실린 '섬진강 기행'이 전부였다. 서정적이고 유려하지만 정확한 문체가 인상적이었던지라 서점에서 보고는 망설이지 않고 들고 왔던 기억이 난다. 결론은 읽지 못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문장 ' 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말할 수 있는 것을 겨우겨우 말하기에도,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한다. '는 내가 그의 글을 읽어나가는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았다. 쓰여진 글을 겨우겨우 읽기에도 나는 기진맥진했으므로 읽을 수 없는 것은 읽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읽기를 그만 두었던 어느 날이 분명히 있었다. 어떤 마음으로 살고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기에 이이의 글은 이렇게 무겁고 빽빽하고 어두울까 생각하다가 읽기를 그만두었던 날.
산문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목이 순했다. 몇 장을 읽어보았더니 이번에는 읽혔다. 그렇지만 다른 책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혔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나갈 때마다 읽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었다. 바퀴가 구르기 시작해서 점점 빨라지는 것처럼, 혹은 굴러가는 바퀴가 내리막길을 만난 것처럼 속도감이 났다. 내리막길의 경사가 급해질수록 넘어지지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긴장하는 것 같은 책 읽기여서 어느새 숨을 멈추고 읽다가 한 번에 토해내는 자신을 발견한 것도 여러 번이었지만 어쨌든 이번에는 읽을 수 있었다. 오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동안 발표한 글을 다시 선별했다고 밝히고 있으니 그동안 작가가 노련해지고 느슨해져서 조금 더 편한 글을 썼다고 할 수도 없는 일. 변화한 것은 나 뿐인가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았다.
김훈은 집요하다. 시선은 날카롭고 묘사는 적확하며 문장은 짧고 논리적이다. 그런 문장으로 라면이나 핸드폰, 러브호텔과 불자동차, 돈과 여자를 이야기한다. 아들에게 돈을 벌라고 하는 글이나 엄마에게 평발을 들이밀지 말라고 하는 글에서는 절로 웃음이 터지지만 웃음 뒤에 어쩔 수 없는 삶의 비애가 묻어난다. 슬픈 글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고 웃기는 얘기에서도 쓸쓸함이 묻어나는 글, 하나하나가 천 근의 무게를 지닌 그의 글을 읽다 보니 사는 게 참 허랑 하고 슬프지만 고개를 돌리거나 떠나갈 수 없다는 걸 -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 새삼 확인하게 된다.
가을에는 바람의 소리가 구석구석 들린다. 귀가 밝아지기 때문이 아니라 바람이 맑아지기 때문이다. 바람이 숲을 흔들 때, 소리를 내고 있는 쪽이 바람인지 숲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이런 분별은 대체로 무가치하다. 그것을 굳이 분별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은 바람이 숲을 흔드는 소리를 바람 소리라고 한다. 바람 소리는 바람의 소리가 아니라. 바람이 세상을 스치는 소리다.
p. 374
어제 오늘 바람이 많이 불었다. 바람이 휘익하고 지나가면 숲이 몸을 떤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휘익하는 그 소리가 바람소리인지 숲의 소리인지 따지게 생겼다. 오리나무 숲과 자작나무 숲, 은사시 나무 숲이 어딘지 찾아내서 바람이 세상을 스치는 소리를 들으러 가 볼 참이다. 책을 읽으면 책 속에서 또 다른 책이나 요리법이나 여행지를 찾아내는 것이 지고의 즐거움인 나는 이번에도 홍명희의 '임꺽정'과 두 페이지에 걸쳐 소개한 시시콜콜하기까지 한 그의 라면 조리법을 얻었다. 거기에 책의 말미에서 박경리 선생까지 만나는 덤을 얻어서 참으로 흡족하다.
마음을 가다듬고 '풍경과 상처'를 다시 읽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