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시인이 쓴 시인 이야기

전영애

by 라문숙

메일은 제목만 보고 꼭 봐야 할 것들이 아니면 지운다. 어느 날은 몹시 심심했는지 온라인 서점에서 보내온 메일을 열어보았다. 그때 ‘전영애’란 분을 알게 되었다. 모니터에는 서재의 책상에 앉아서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올려져 있었다. ‘시인의 집’이란 책을 출간한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 신간들을 훑어보다가 노란 책의 표지가 인상적이어서 내용 소개를 읽어본 기억이 났다. 목차에 카프카가 들어있어서 의외였고 독일어로 시를 쓴 시인들의 자취를 찾아간 이야기라 하길래 시와 여행을 적당히 버무린 수필집인 줄 알고 그냥 넘어갔었다. 인터뷰 내용을 읽어내려 가다가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이 얼마나 외로운가. 그래서 좋아하는 걸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달려가 기웃거렸다고 그랬다. 사람이 외로운 걸 아는 분이라면! 바로 주문해서 받았다. 책은 의외로 두꺼웠고 사진은 많지 않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기뻤고 그리고 아팠다. 한 장을 읽으면 그만큼 내가 보여서 기뻤고 그 모습이 외롭고 가여워서 아팠다. 서둘러 읽고 싶지 않았지만 책은 금방 읽혔다. 그렇게 두 번, 세 번을 읽고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며칠을 보냈다. 글은 깊은 사유를 담고 있어 밀도가 높았고 투명할 만큼 정직해서 들여다보면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보일 것 같았다. 문제는 어쩌다가 정말로 그 깊은 끝에 다다르게 될까 봐 겁이 나서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저자 역시 시인이다. 저자는 독일어로 시를 쓴 시인의 집들을 찾아다닌다. 시인이 살았던 도시에 도착해서 시인이 공부했던 대학과 도서관을 찾고 시인이 걸었던 길을 걷는다. 독일의 여러 도시와 파리, 에스토니아, 루마니아, 로마를 걷는다. 어쩌면 스스로가 감당하기 어려울 때 그렇게 걸으면서 걸음걸음마다 가슴속의 응어리나 어깨의 짐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시인의 집들을 찾아다니는 여행기도 아니고 시인의 생애를 다룬 전기도 아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시인이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을 산 시인들의 흔적을 찾아간다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이 두꺼운 책의 주인공은 파울 첼란이나 카프카, 릴케, 쉴러, 괴테도 아닌 저자 자신이라고 해야 옳다. 저자는 시인의 입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행복하기만 한 삶은 없겠지만 시인들의 삶은 더욱 격렬하고 극적이다. 약물, 음주, 누이동생과의 근친상간 끝에 자살한 게오르크 트라클, 홀로코스트로 부모를 잃고 본인은 살아남았지만 결국 센 강에 투신한 파울 첼란, 담뱃불로 번진 화재로 죽은 잉에보르크 바하만, 반체제 작가로 추방당했던 라이너 쿤체, 언어와 조국 모두에서 고립된 프란츠 카프카, 장미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독일 참여문학의 선봉이었으나 죽은 후에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오랫동안 외면당했던 하인리히 하이네, 브레히트와 바우만과 휠덜린을 거쳐 쉴러와 괴테에까지 이르는 여정이다(괴테 부분을 읽다가 괴테의 자서전 '시와 진실'의 번역자가 바로 이 책 '시인의 집'의 저자인 걸 알았다. 유려한 번역에 반해서 그 두꺼운 책을 매끄럽게 읽어내려 갈 수 있었음에도 번역자를 기억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삶이 복잡하고 고통스러울수록 시는 명쾌하고 영롱하다. 생각이 많은 사람이 말수가 적은 것처럼.




세상이 온통 어둠뿐인 듯했던 이십 대 후반, 인생에 대한 아무런 전망도 설계도 할 수 없던 그 적막한 시절, 좁은 방에 엎드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카프카를 옮겼다. 그냥 알고 싶었다. 카프카가 누구인지. 문학에 명(命)을 건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 십 년 그렇게 방안에 있으면서, 또 나중에는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그의 글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저녁 무렵 아이를 업고 현관문을 나서 좁은 아파트 복도를 오락가락하노라면, 그래도 아직 기다릴 게 있는 듯했다. 그것은 카프카의 ‘황제의 전갈’처럼 올 듯도 했고, 또 결코 오지 않을 듯도 했다. 아니, 결코 오지 않는 줄 알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무슨 소식을 듣고 나에게로 오려고 애쓰고 있으리라는 그 쓸쓸한 상상은 절망적 기다림을 견뎌내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p.127


아이를 기르고 살림을 하면서도 내 몸 한 구석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었다. 살면서 기쁘고 행복했던 날들은 아련하고도 애틋했다. 그런 날들에는 구석진 곳에서 부는 바람을 불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카프카의 ‘황제의 전갈’을 기다리던 시간들이 분명 있었다. 그걸 지금인들 의심하지 않고 부정할 수 있을까? 나 아닌 그 누구라도 말이다.




감내하는 것, 시로 써내는 것, 그에 집중하는 것 – 이를 어렵게 하는 ‘산만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눈에 보이는 일상은 끝없이 삶에의 그리움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삶은, 삶의 흔적들은, 감미롭고 강렬한 삶에의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그 다채로움으로의 환상은 늘, 증폭된다.

p. 232


항상 그랬다. 자는 시간,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자지 않고 몰아 먹으면서 책장을 넘기던 시절에도 문방구 옆 슈퍼마켓에서 아이를 업고 장바구니를 들고 나오는 여인들을 볼 때면 살림의 유혹에 맞서 싸우느라 온몸이 나른해지곤 했다. 수업이나 시험이 없는 주말에는 스스로 그 유혹에 굴복했는데 그건 또 얼마나 달콤하고 강렬한 기쁨이었는지.




눈길은 늘 그렇게 삶에 끌리고 만다. 사랑과 미움으로 이루어진 무언가가 물음들을 불러일으킨다. 낯선 곳에서는, 군중 속에서는 더더욱, 언제나 두리번거리게 된다. 혹시 거기 어느 한 귀퉁이에서 불쑥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을까. 이런 환각에서는, 또다시 한 걸음 떨어져서 보아도, 삶의 유혹이 풍겨나온다. p. 233


저자는 이 책이 오래 묵은 책이라 했다. 처음부터 책을 만들기 위해 글을 모은 것이 아닌 것처럼 처음부터 시인의 집을 찾아 떠난 여행이 목적이 아니라고 했다. 학회 일정을 마친 후 공항에 가기 전까지 남은 자투리 시간에 시인의 흔적을 찾아다녔단다. 시인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보고 시인이 걷던 길을 걷고 시인이 기대었음 직한 창가에 기대어 시인이 내려보았던 길에 시선을 주었다. 일이 끝나고 돌아가기 전이므로, 돌아가야 할 곳, 돌아가서 마주할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짧은 산책과 깊은 사유. 언제나 일상적인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언제나 돌아오고 싶고 또 언제나 벗어나고 싶은 장소 혹은 시간. 그래서 떠나 있어도 외롭지 않은, 혹은 돌아와서도 언제나 외로운 일상. 일상이 위대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못 이기는 척 유혹에 넘어가면 어찌어찌해서라도 살아지니까. 우리 모두 여전히 그렇게 산다. 그 부분에 관해서라면 시인과 시인이 아닌 사람의 차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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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경기도 여주 땅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했다.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한밤중이든 꼭두새벽이든 먼 거리를 달려 찾는 곳이라 한다. 여기 오면 숨이 쉬어진다고, 이 조그만 집 다락에 오그리고 있노라면 시들었다가 다시 물병에 담가 둔 꽃처럼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이 집을 아직 써야 할 것이 있어서 하늘이 준 것 같은 사치라고 한다. 무언가 정갈한 것, 언어의 경계마저 넘어서서 정갈하게 기록될 수 있는 삶의 핵. 그리고 낯설고도 따뜻한 자잘한 것들을 적기 위해서.


문장 하나하나가 시처럼 아름답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서부터 중간중간 심호흡을 해야 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하니 책 한 권 전체가 한 편의 시였다. 저자가 건강하기를, 그래서 그녀가 쓰고 싶은 것들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치스럽게 적어나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짧은 시 하나가 저절로 외워졌다.


들어오셔요, 벗어놓으셔요 당신의

슬픔을, 여기서는

침묵하셔도 좋습니다

한잔 자스민차에의 초대, 라이너 쿤체,

시인의 집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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