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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Dec 29. 2015

2015 내가 읽은 책 베스트 5

함께 읽고 싶은 책

                                                                                                                                                                                                                                                                                                                                                                                                                                                                                                                                                                                                                                                                

방안에 있던 책장을 밖으로 내어놓으니 당장 읽던 책을 꽂을 자리가 없어 잠시 허망해하다가 책들을 책상 위에 나란히 세워두었다. 서너 권의 책이 허전해 보여서 다시 읽고 싶은 책, 자주 읽는 책 몇 권을 추려서 그 옆에 나란히 세워 놓았더니 책상 앞에  새로 책꽂이 하나가 놓인 듯한데 내게는 그 모습이 마치 만리장성처럼 보인다. 문장 속으로 들어가 아무리 오래 헤매어도 두렵지 않을 만큼 깊고 두터운 장막으로 만든 성벽처럼 느껴지는 책들을 보고 있다가 올해 읽었던 책 중에서 다섯 권을 추려보기로 하였다.

시인의 집


생각보다 책이 두꺼웠다. 처음 읽어보는 저자의, 그것도 이름만 알뿐 잘 알지 못하는 시인들과 시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낼까 싶어 받아들고도 며칠 망설이다가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지만 몇 장 넘기지 않아 책에 빠져들어 거푸 세 번을  읽었다. 방금도 책장을 넘기다가 두어 페이지를 읽었다. 딱히 시를 좋아하지 않고 여행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인간과 삶과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이라면 마땅히 빠져들만한 책이다. 하긴 책을 읽기 좋아하는 이 중에 시나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시인의 집                                                    

저자                                             전영애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5.07.29.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그림'들이 있다.
한두 장의 그림으로 응축되어 남아 있게 되는 것들.
나는 그것들에 대해 조금 적어두고자 한다.                          p. 4

첫째, 시인 아줌마는 왜 텔레비전을 안 보고 책만 보는 것일까. 둘째, 아빠도 엄마도 주말에는 쉬고, 할머니는 좀 많이 쉬시고 자기도 쉬는데 왜 시인 아줌마는 쉬지를 않는가. 셋째, 어른이 왜 그렇게 작을까. 혹시 죽기 전에라도 조금 클 예정인가(죽기 전에라도 조금 키가 커질 수 있을까 - 지난번 단체 건강검진 때 보니 오히려 조금 줄었던  데...... 내 안 어딘가에 아직 키 키울 수 있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p.492



라면을 끓이며


그동안 김훈을 읽지 못 했다. 읽다 보면 숨이 막히곤 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물을 가두었던 댐의 수문이 열린 듯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읽어내려갔던 책이다. 마치 동그란 바퀴를 타고 내리막길을 마구 달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혹시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까? 마지막에 다다르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그제야 찬찬히 다시 살펴볼 수 있었고 화낼 수 있었고 웃을 수 있었다. 언젠가 그가 유럽을 자전거로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의 어조가 무척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올해 이 책을 읽는데 마치 그가 옆에서 책을 읽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의 높낮이와 빠르기를 그대로 빼닮은 문장이 한 권 가득하다. 자신의 문장과 자신의 목소리가 닮은 사람이니 그의 글은 아마 진실될 것이다.


라면을 끓이며                                                    

저자                                             김훈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5.09.30.                                         



글이란 아무리  세상없이 잘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몇 줄이라 하더라도 그 물적 바탕은 훈민정음 스물네 글자를 이리저리 꿰어 맞추고 붙였다 떼였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글을 쓸 때, 오른손엔 연필, 왼손엔 지우개를 쥔 내 몸은 부지할 곳이 없고 숨 쉴 공기가 모자란다. 다 큰 사내가 어찌 연필과 지우개만으로 그 몸의 일을 넉넉히 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는 도저히 못한다.    p. 128

나는 본래 어둡고 오활하여, 폐구 閉口로 겨우 일신의 적막을 지탱하고 있다. 더구나 궁벽한 갯가에 엎드린 지 오래니 세상사를 입 벌려 말할 만한 식견이 있을 리 없고, 이러한 말조차 아니 함만 못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하되, 잔잔한 바다에서 큰 배가 갑자기 가라앉아 무죄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태가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하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몸을 차고 어두운 물밑에 버려둔 채 새해를 맞으려니 슬프고 기막혀서 겨우 몇 줄 적는다.                              p.153



리스본행 야간열차


올해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이 책이 제일 낡은 몰골을 하고 있다. 구겨지고 여기저기 접히고 물에 흠뻑 젖었다가 마른 자국도 있고 아직도 여러 군데에 스티커가 붙어 있다. 서점에 가서 서가를 돌아다니다가 이 책을 봤는데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보라고 했던 남편의 말이 생각나서 책장을 넘기다가 그대로 사가지고 온 책이다. 평생 책과 함께 살던 중년 남자가 책 밖의 세상으로 나가는 이야기다. 자신의 삶이 이렇게 전개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을 두꺼운 안경을 쓴 대학교수 그레고리우스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버려두고 그대로 강의실을 나와 에스파냐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고는 리스본행 기차를 탄다. 한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이 책을 이야기했다. 이런 책이 있어요. 읽어보셨어요? 어땠어요? 꼭 읽어보세요. 그 후에 우리 만나요. 만나서 그레고리우스와 프라두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해요. 이렇게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을 살았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저자                                             파스칼 메르시어                                         

출판                                             들녘                                         

발매                                             2014.03.25.                                         


가게 유리창 안에는 자기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그는 프라두가 했던 대로 낯선 사람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이 낯선 시선을 자기 안에서 만들고, 그런 시선에서 나온 자기 모습을 자기 안에 받아들였다. 이제 막 만난 이방인처럼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                                                                  p.108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이게 가능할까. 자기 시간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자각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p. 127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p. 279

행복한 그림자의 춤


가끔 한순간에 전 생애가 농축된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유난히 긴 하루를 보내서 오전에 일어난 일을 까마득한 옛날의 일로 기억하거나 혹은 아예 잊기도 한다. 처음 온 곳인데 예전에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 장소,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친숙한 느낌을 지닌 사람들을 만날 때면 사는 건 회전목마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날은 매일 새날인데 일상은 되풀이되고, 매일 하는 일, 매일 만나는 사람인데도 낯설고 새로운 시간들이 그렇다. 엘리스 먼로는 짧은 소설을 쓴다. 하지만 그녀의 단편소설은 여느 작가의 장편소설보다 길게 느껴진다. 에피소드 하나마다 등장인물의 전 생애, 전 세계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녀의 짧은 소설 하나를 읽고서도 나는 그녀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 든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                                                    

저자                                             앨리스 먼로                                         

출판                                             뿔                                         

발매                                             2010.05.01.                                         


집은 남자가 일하기에는 아주 좋다. 남자가 일감을 가져오는 집은,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고 일하기에 딱 좋도록 남자 중심으로 새로 배치할 수도 있다. 남자에게는 일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아준다. 따라서 으레 전화를 받는 일도, 어디 두었는지 모를 물건을 찾는 일도, 아이들이 왜 우는지 알아보는 일도, 고양이 먹이를 주는 일도 기대하지 않는다. 방문을 닫아걸어도 무방하다. 방문이 닫혀있고 그 방 안에 엄마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안다고 생각해 보라. 왜냐.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도 용납하기 어려울 테니까. 여자가 허공을 응시한 채, 남편도 자식도 없는 엉뚱한 곳을 바라보는 건 자연의 섭리를 저버린 짓과 마찬가지라고 여길 테니까. 그러니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다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p. 13

김화영의 번역수첩


서점에 가서 책을 사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책의 내용을 미리 살펴보기 위해서다. 책의 아무 곳이나 펼쳐서 몇 문장, 혹은 한두 페이지를 읽어보면 문장의 밀도나 글의 깊이 등을 대충이라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고른 책들은 대부분 실망을 주지 않으며 곧이어 그 책과 연결고리가 있는 다른 책들로 읽기가 이어지게 마련이어서 내 책 읽기의 지평을 넓히고 그 심도를 깊게 해주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사는 일도 종종 있는데 대부분 고전문학작품이거나 내가 신뢰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번역서의 경우는 조금 다른데 번역자가 믿을만해도 원작이 나와 맞지 않는 경우가 간혹 있어 주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자가 김화영 교수인 경우는 언제나 예외다. 그의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도 일품이지만 그가 골라내서 번역한 작품들 또한 그의 문장만큼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그동안 번역한 작품들의 번역 후기를 묶어서 책을 냈다니!!

김화영의 번역수첩                                                    

저자                                             김화영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5.11.22.                                         


그렇다. 어떤 꿈은 깨어나는 데 20 년 씩이나 걸리기도 한다.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 비로소 꿈은 꿈으로서 총체성을 획득한다. 꿈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을 때 우리가 어찌 그것이 꿈인 줄 알기나 하겠는가. 참다운 인식은 꿈 깨임이다. 그러나 동시에 참다운 인식은 그 꿈을 노래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p. 66

한 장 한 장의 사진은 그런 조각조각 난 삶의 한순간, 한 조각을 담은 작은 섬이다. 그 조각조각 난 편린들을 한데 모아 전체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소설가가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체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p. 112

뒷모습은 쓸쓸하다. 나에게 등을 돌리고 가는 사람,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등을 돌리고 잠자는 사람, 나를 깨어있는 기슭에 남겨두고 잠의 세계로 떠난 사람은 우리를 쓸쓸하게 한다. 그러나 그 쓸쓸함이 더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이 더 애달픈 때도 있다.                                              pp. 166


내가 누리는 가장 큰 호사는 하루가 저물어 해야할 일이라곤 잠자리에 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시간에 오로지 책을 읽기 위해 불을 밝히고 깨어있는 것이다. 늦은 밤, 봄에는 소쩍새가 울고 가을에는 밤벌레가 운다. 오늘처럼 추위가 코앞까지 다가와서 얼어붙은 대기가 쨍하고 깨어질 것 같은 밤에 좋아하는 문장을 더듬거리며 읽어내려 가는 즐거움을 어떻게 설명할까? 하루가 심심하면 책은 호사가 되지만 힘들었던 날에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지친 날, 몸보다 마음이 피곤해서 심술이 나거나 우울하거나 혹은 슬플 때도 책을 읽는다. 문장 속에 숨어있으면 누가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글자들이 만들어 놓은 숲으로 깊이 들어간다. 글자와 부호와 문장들의 숲에서 마음대로 걷고 뛰고 춤추는 것, 그래서 내게 책 읽기는 바로 휴식이고 여행이고 삶이다.

고마운 한 해가 또 갔습니다.
내가 책을 읽는 동안 혼자 혹은 둘이 잘 놀아준 남편과 딸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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