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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ug 19. 2024

하워스, 1904년 11월

브론테자매들, 박완서, 에쿠니 가오리

 <하워스, 1904년 11월>이란 짧은 에세이는 버지니아 울프가 공식적인 지면에 처음 발표한 두 편의 글들 중 하나로 1904년 12월에 <가디언>지에 실렸다. 그 얼마 전에 요크셔에 있는 친지를 방문했을 때 하워스에 있는 브론테 생가에 다녀와서 쓴 글이다. 그는 “브론테 자매와 하워스는 껍데기 안의 달팽이처럼 서로 꼭 들어맞는다”라고 썼다. [제인 에어]나 [폭풍의 언덕]의 인물들이 황야를 배경으로 서 있지 않았다면 그 책은 우리가 지금 읽는 그런 책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자매들 중 황야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에밀리 브론테였다. 그녀는 16살에 언니와 함께 기숙학교에 가지만 3개월 만에 돌아왔다. 그녀가 못 잊은 건 집도 아버지도 아닌 황야, 히스 들판이었다. 황야를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병이 났는데 언니인 샬롯 브론테가 저러다가 죽는 게 아닌가 겁이 나서 집으로 보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브론테 아이들은 모두 산책을 좋아했지만 그중에서도 에밀리가 유난했다. 에밀리에게 산책은 바로 글쓰기의 과정이었다. 황야를 걷다가 떠오른 착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에밀리는 작은 참나무 걸상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걸상을 들고 다니다가 영감이 떠오르면 바로 그 자리에 걸상을 내려놓는 식이다. 하워스는 샬롯 브론테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문학 순례자들의 성지였다. 특히 여성 작가들은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그곳을 다녀갔다. 버지니아울프도 다녀갔고, 실비아 플라스도 결혼 직후 신혼여행처럼 다녀갔다.

  

    박완서 역시 그의 산문집 [노란 집]에서 하워스에 다녀온 일을 언급한다. 90년대 초반이었는데 근처까지 가기는 했지만 황야에는 가지 않았다. 마을에서 묵고 기념관에서 1800자짜리 [폭풍의 언덕] 한 권을 산 게 전부였다. 고등학교 때는 [폭풍의 언덕]을 읽느라 시험을 망치기도 했고 목사관 사진만 보고도 가슴이 울렁거렸다는 작가가 히스 들판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작 현장에 가보니 자신이 '너무나 늙고 아무 데나 헤집고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한국인이라는 게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라고 쓰고 있다. 사람들이 황무지에 가는 걸 보고 브론테 자매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저렇게 허풍을 떠나 아니꼬웠다고 하면서도 곧 그건 본인 스스로 변방의 언어를 모국어로 가진 작가의 꼬인 마음 때문이었을 거라고 토로한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쉬운 마음이 더 컸다. 박완서의 눈에 비친 히스 들판을 보고 싶다. 그러면 여전히 들판 여기저기를  달리고 구르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를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 밤을 새워 에밀리 브론테를 읽던 고등학생과 브론테 자매가 즐겨 찾았던 히스 들판을 코앞에 두고 아니꼬워 가지 않겠다는 작가 사이에 무엇이 놓여있을지 상상해 본다. 


     에쿠니 가오리도 하워스에 간 적이 있었다. <장화>라는 짧은 에세이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위해 하워스에 갔던 때의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하워스는 상상했던 것보다 한층 황량한 고장이었다’ 이 한 문장이 전부였다. 겨울이었고 눈보라가 몰아쳤으며 가죽 부츠 속에서 얼어버린 양말과 붓고 곱은 발, 눈물이 빠질 정도로 아픈 발가락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다음날 모스그린 색 장화를 신고 히스 들판을 휘젓고 다니며 촬영을 마쳤다는 이야기다. 처음 그걸 읽고서는 아니 거기까지 가서 고작 장화 타령인가? 했다. 하지만 글의 제목도 ‘장화‘였고 그 글이 실린 책도 작가가 좋아하는 사물에 관한 글들을 모은 것이라 트집을 잡을 일은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에쿠니 가오리 역시 박완서와 표현만 달랐지 같은 말을 한 거라고 믿고 싶었다. 에쿠니 가오리가 종종 봄날 아지랑이나 나뭇잎들을 간질이는 햇살로 우울과 낙담을 감추는 것처럼 모스그린 색 장화 속에 열등감이나 꼬인 마음을 숨겨놓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 와 생각하니 열등감이나 꼬인 마음은 에쿠니가 아니라 바로 나의 것이 아니었나 싶어 진다.


    버지니아 울프가 브론테 자매를 언급할 때마다 브론테 자매들의 글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좋은 글은 독자들로 하여금 계속 그리고 새롭게 읽게 만들고 또 쓰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하워스, 1904년 11월>은 좋은 글이 틀림없다. 그중 제일 부러웠던 문장은 버지니아 울프가 바이올렛 디킨슨에게 보낸 편지에 쓴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데 두 시간도 안 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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