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잠들기 전 생각은 분명히 그랬다.
"이제 됐어. 다시 안 봐도 돼. 아침에 일어나서 보내버리면 끝이야."
유난히 힘들었던 글이었다. 머릿속에 오래 들어있던 이야기였으므로 자리에 앉기만 하면, 노트북을 열기만 하면 두어 시간 안에 초고는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초고만 쓰면 그 후에는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읽어보면서 퇴고를 하면 될 거라고, 무엇보다 글감도 이미 골라놓았고 시간은 넉넉한 데다 특별히 다른 할 일도 없으니까 여유를 부려도 괜찮지 않겠느냐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물론 쓰는 사람은 다 안다. 이게 착각이라는 걸. 나 역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당장 쓰기 시작해야 한다는 걸.
그럼에도 오늘은 너무 더우니까, 너무 피곤해서,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쓰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서, 핑계는 무궁무진했다. 갑자기 가고 싶은 곳이 생기고, 먹고 싶은 게 생각나고, 읽고 싶은 책이,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복중에 뜨개질은 웬 말이며 책장정리는 또 왜 하고 싶을까? 거울을 볼 때마다 정신 차리라고 야단을 치고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주문을 외웠다. 오늘은! 아니면 내일부터! 아침의 다짐이 저녁이면 흩어지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날은 왜 그다지도 덥고 밥때는 왜 그렇게 빨리도 오는지 조금씩 마음이 급해졌다.
정작 쓰기 시작하고 보니 이게 웬걸. 좋은 글감이라 여겼던 게 사실은 어려운 글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도통 글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써지는 대로 쓰다 보면 쓰려고 마음먹었던 글이 아니었다. 내가 내가 맞나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날이 너무 더운 거야, 여름 나느라 지친 거지, 그러다가 생각을 좀 바꿔도 괜찮지 않겠어? 타협했다. 일사천리로 초고를 완성하고 난 다음날은 종일 글자 한 자도 보지 않고 빈둥거렸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더없이 너그러워져서는 사과를 조려 파이까지 만들었다. 딱 하루의 평화였다.
사실 초고라고 부르기에도 뭣한 글이었다. 이걸 글이라고 쓴 거야. 거울 속의 내게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눈을 부릅뜨고 글바느질을 했다. 자르고, 옮겨 붙이고, 꿰매어서 이었다. 누덕누덕 기웠으나 어쨌든 완성이라 할 만한 걸 만든 게 바로 어젯밤이었던 것이다. 거봐. 할 수 있잖아. 잠도 잘 잤다.
오늘 아침 눈을 뜨니 4시 50분. 원고 생각에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5초 정도 고민하다가 조금만 더 자기로 했다. 다시 눈을 뜬 시각은 6시 50분, 이왕 늦었으니 아침 먹고 보내기로 했다. 방으로 다시 올라온 건 9시. 파일을 열고 읽어나갔다. 단락이 넘어갈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했다. 그래, 좋아, 이 정도면 됐어. 그러다가 주춤했다. 거의 끝부분에 거슬리는 문장이 있었다. 그냥 보낼까? 고칠까? 당연히 다시 써야지! 거슬리는 건 한 문장이지만 고치기 시작하면 전체 글을 다시 봐야 하는데 시간이 될까? 그래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2시간 넘게 끙끙거리며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살폈다. 실마리를 찾았을 때는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눈을 감고 김연수를 생각했다. '초고'를 '토고'라고 부른다고 했지. '토할 만큼 힘들게 써서' 이기도 하고, 자기가 쓴 글을 보면 토가 나온다고 '토고'라고 부른다는 소설가.
오늘 '토고'를 '원고'로 바꾸었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말러를 자장가 삼아 일찍 자겠다던 당신,
지금 뭐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