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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없는 건 안 먹어

by 라문숙

엄마집에 갔다가 그곳 로컬마트에서 사과를 샀다. 기후변화로 날이 점점 더워져서 사과 재배면적이 점점 줄어들 거란 보도를 기억했던 탓일까? 제철도 아닌 연둣빛 작은 사과가 얼마나 반갑던지 냉큼 집어 들었다. 사과가 든 비닐봉지를 카트에 넣을 때부터 아직 맛이 안 들었을 거라는 걸 짐작하긴 했다. 여름밀감과 복숭아, 작은 수박과 예의 사과 한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사과는 먹음직스러운 과일이 아니라 어머, 예쁜 것, 감탄의 대상일 뿐이었다.


냉장고 깊숙이 넣어진 사과를 꺼낸 건 오래 막혔던 글의 초고를 완성한 날이었다. 원고지 20장 정도의 짧은 글을 가지고 그렇게 고생했던 적은 처음이어서 초고였음에도 불구하고 홀가분하기가 밀린 방학숙제를 해치운 듯 개운했다. 냉장고 속 사과를 한 알 꺼내 껍질을 벗겼다. 생각보다 딱딱했다. 사과 향기도 거의 나지 않았다. 게다가 맛도 없었다. 얼마나 느긋하고 평온했는지 그런 사과를 베어 물고도 그럴 수 있겠다 했다. 그냥은 못 먹을 것 같으니 사과 콩포트를 만들어둘까 하다가 애플 타르트를 굽기로 했다.


맛있던 시절의 애플 파이

우리가 애플 타르트를 남긴 건 그날이 첫 번째였다. 버터와 설탕에 버무려진 사과가 럼주와 시나몬에 조려지는 냄새를 맡아본 이들은 안다. 부르기도 전에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고 오븐이 열리기를 먼저 와서 기다려 본 이들도 안다. 잘 익은 사과가 얼마나 향기롭고 달콤하건 그건 두 번째라는 걸 말이다. 첫 번째는 애플파이, 애플 타르트, 타르트 타탱인 것이다(이렇게 적어두고 자신이 없어서 '우리 집에서'란 단서를 붙여둔다). 그런 애플 타르트를 앞에 두고 아이는 애플 타르트 냄새가 나는 무조림이라 했고 남편은 웃기만 했다. 그리고 남겼다!


[엠마]의 나이틀리 씨는 사과를 키운다. 던웰에는 사과나무가 두 그루, 굽기에 적합한 품종이다. 해마다 베이츠부인 집에 한 자루씩 보내는데 제인이 돌아온 해에는 한 바구니를 더 보내서 베이츠 부인을 감동시킨다. 도무지 말이 끊이지 않는 베이츠 부인의 사과 얘기를 듣는 건 우드하우스 씨가 보낸 돼지고기 이야기만큼 인상적이다. 우드하우스 씨는 구운 사과가 건강에 좋으니 사과는 꼭 구워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베이츠 부인은 구운 사과가 건강에 좋다는 건 알아도 튀긴 사과를 더 자주 먹는다고 했다. 사과나무를 키우는 나이틀리 씨는 사과를 구워 먹거나 쪄먹거나 하지만 사실 제일 좋아하는 건 애플 타르트라고.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세상에 정말 사과를 두 번 구울지 세 번 구울 지를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상상한다. 게다가 쪄먹기도 했다니. 사실이었을까? 제인 오스틴의 익살이었을까?


농업진흥청 발표에 따르면 2040년 경 우리나라에서는 사과재배에 적합한 재배지가 지금보다 70% 이상 감소할 거라고 한다. 사과가 아무리 귀해도 맛도 안 든 사과를 따서 파는 건 바보짓이다. 사과를 안 먹으면 안 먹었지 무 같은 사과는 사절이니까. '맛없는 음식은 안 먹는다' 했던 박완서가 다시 생각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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