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요란하다. 아침에는 화창하더니 오후에는 계속 비가 내렸다. 시청 앞 잔디밭 가장자리를 지나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습기를 잔뜩 머금은 비냄새가 훅 끼쳐왔다. 반가웠다. 흙냄새였다. 잠들어있던 냄새들이 습기가 높아지면 한꺼번에 몰려나오기 때문이라는 다소 엉성한 이유를 알려 준 선배가 생각났다. 선배는 말놀이를 좋아했는데 익숙한 단어의 숨겨진 뜻을 알려주거나 낯선 단어의 뜻을 설명하는 걸 즐겼다. 가끔은 새로운 단어를 즉석에서 만들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흔히 사용하는 용법 대신 새로운 해석을 곁들인 단어의 쓰임을 보면서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언어가, 그 색과 온도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때 익혔던 단어를 지금 사전에서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내 기억보다 훨씬 많은 단어들을 내가 보는 앞에서 급조한 게 아닌가 싶었다. 놀랍고도 즐거운 재능이었다. 익히는 걸 넘어 만들기!
광장에서는 확성기를 통해 나오는 목소리들이 쟁쟁거렸다. 핵무장, 한반도 같은 단어들이 조각난 채 들려왔다. 확성기를 통해 퍼져 나오는 소리는 컸으나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을 전하는 데 필요한 건 큰 목소리가 아니라 적확한 목소리랍니다. 방금 참석했던 출판기념회에서 얻어온 깨달음이지요.) 조금 걷자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모이고 흩어졌다. 비를 맞지 않으려고 또는 비를 맞으려고, 우산을 펴는 이도 있고 우산 가게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이도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걷는 사람도 봤다. 기억해야지. 갑작스러운 공기의 움직임, 부산한 몸짓, 비냄새, 수증기와 땀, 흐린 하늘, 목소리, 박수소리, 그리고 눈물, 껴안음.
웬일일까? 밤벌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방의 가구를 옮기고 아직 커튼을 달지 않은 창밖으로 숲의 어둠이 보인다. 참나무가, 기울어진 산벚나무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아침이면 변함없을 것이다. 분명히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을 얘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음악 같고 그림 같은, 너는 너만의 춤을 추라고 했던 말, 그런 말을 나도 하고 싶네. 이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