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국립 미술관 컬렉션 전시에 다녀왔다. 19세기 후반 북유럽예술가들의 작품들이라고 했다. 매일의 삶, 눈을 돌리면 바로 옆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표정들의 인물화들 사이에 풍경화들이 있었다. 낮은 하늘, 완만한 구릉과 반짝이는 바다, 굽은 산길을 담은 그림들 앞에서 움찔거렸다. 한스 프레드릭 구데 Hans Fredrik Gude의 <샌드빅의 피오르 The Sandvik Fiord> 란 작품 앞에서 한참을 있었다. 구름이 수평선에 닿을 듯 낮게 내려앉았는데 바다는 잔잔히 반짝이고 해안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섬이 보였다. 섬에는 나무 몇 그루와 작은 오두막이 둘, 바다에 배가 떠 있는데 주변에 어장이 있는 걸 보면 아마 어부가 타고 있으리라. 그림을 보자마자 떠오른 건 토베 얀손의 [여름의 책].
하루의 대부분을 소피아와 할머니 둘이서만 보내는 여름의 섬. 아이는 할머니 같고, 할머니는 아이 같지만 소피아는 아이, 할머니는 아이를 지나온 할머니. 소피아는 아이라서 묻고 울고 무서워하는데 할머니는 할머니라서 무엇이든 알고 있어야 하고(소피아처럼 모르는데), 어떤 질문에도 대답해야 하며(몰라도 아는 척), 겁을 내서도 안 된다(실은 소피아만큼 두려운데). 이웃도 거의 없고 바다와 하늘과 쓰러진 나무들이 길을 가로막은 작은 숲이 전부인 섬에서 아이는 자라고 할머니는 늙는다. 그곳의 여름은 아름답고 난폭하고 외롭다. 조용하고 뜨겁고 메마른 곳, 폭풍이, 파도가 잠을 깨우고 잠들게 하는 곳. 할머니와 소피아의 여름을 그림 속에서 만난 것일까.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아! 엄마가 내게 했던 말. 낯선 이들이 집에 오는 걸 싫어했었다. 하던 걸 멈추고(때로는 재빨리 숨기고 치워야 하기도), 공손하게 인사를 해야 하고(누군지 알지도 못하는데), 그들이 가기 전까지는 조심조심, 조용조용 꾹 참고 있어야 했던 시간들이 싫었다. 있으면서도 없는 척 방에 숨어있으면 더 나빴는데 끝까지 없는 척을 하느라 방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심술을 내면 그때 엄마가 했던 말, '무인도 가서 혼자 살아!' 그림 속에서 그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아서 공연히 웃음이 났다.
저런 곳이라면 두말 않고 살지. 육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지금도 섬에 살고 있는 걸. 무인도를 찾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식구들, 감사합니다. 그런데 <샌드빅의 피오르>란 그림 속의 저 섬, 한 번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