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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ug 26. 2024

엄마는 요술쟁이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엄마? 너 쌀 있니? 있지. 하나 보낼까? 보내줘. 전화는 벌써 끊겼다. 엄마와 전화로 수다를 떤 기억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을 던지고 듣고 싶은 말을 들으면 그대로 뚝, 끊는다. 그게 엄마의 방식이다. 쌀이라니! 엄마는 농사를 짓지 않는다. 그럼에도 엄마집에 다녀올 때는 자동차 트렁크에 보따리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엄마의 고추장, 엄마의 볶은 깨, 엄마의 생강가루, 엄마의 누룽지, 엄마의 장아찌, 엄마의 김치, 그리고 오늘 전화에서는 쌀! 엄마의 마법이다.


  작년에 엄마와 나는 같은 일을 겪었다. 가까운 친구를 떠나보냈다.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냥 알았다. 그게 어떤 일이라는 걸. 엄마 집에 가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밥을 먹고 나란히 앉아서 밤늦게까지 트로트를 들었다. 재작년 겨울 김장 때 엄마는 내 친구에게도 김치를 보냈다. 고등학교 때부터 봐오던 아이였으니 딸 같았을 것이다. 작년 김장철에 그 생각이 안 났을 리 없었지만 역시 아무 말도 안 했다. 말을 하는 게 좋을 때도 많지만 자칫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 될까 봐, 엄마도 나도 말 안 해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양파 두어 개 가져와, 엄마가 그러면 두어 개가 두 개야? 세 개야? 되묻던 나는 양파 가져오라던 그때의 엄마보다 나이가 더 들었다.


  엄마 집에서는 모든 것이 쉽다.  하루 세 번 어김없이 돌아오는 끼니마다 먹는 것도 쉽고 싱크대 가득 쌓인 설거지도 쉽다. 거실에 요를 깔고 눕는 것도 쉽고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면서도 잠을 곧잘 잔다. 냉장고가 가득 차 있어도 답답하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도 불안하지 않다.  무엇보다 엄마 집에 다녀오면 다짐이 생긴다. 더 잘 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비어있는 일기를 들여다보고 답하지 않은 메일을 살핀다. 싱크대 물기를 한번 더 닦고 비어있는 양념통을 채우고 연필을 깎는다. 엄마를 생각하면 힘도 나고 웃음도 난다. 오이지 위에 누름돌을 얹으며 오래오래 변하지 말고 잘 익으라고 주문을 왼다. 꽃대가 나오게 생긴 상추를 뽑고 새로 사 온 모종을 심었다. 완두콩을 마지막으로 거두고 고추를 얼리고 시든 장미를 잘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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