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각, 늙어서 누렇게 된 오이를 이른다. 갈빛이 섞인 진노란색 껍질이 거칠고 단단하다. 성긴 레이스를 씌운 것 같기도 하고 갈라진 손바닥처럼 딱딱하기도 하다. 팔뚝 만한 노각 세 개를 건졌다. 오이 모종 두 개를 사다 심었는데 작년에 오이를 심었던 곳에서 한 포기가 더 나와 올해 오이는 모두 세 포기였다. 말간 얼굴의 오이꽃에 코를 갖다 대면 오이 냄새가 났다. 새끼손가락만큼 작을 때부터 온몸을 가시로 뒤덮어 서슬이 퍼렇게 자랐다. 오이가 한 뼘 정도 커지면 눈여겨봐야 한다. 아침에 아직 작은데, 하고 잊기라도 하면 다음날 아침 늙어버린 오이를 만나게 되니 참 성질도 급한 채소다. 물이 부족하면 곧게 자라지 못하고 꼬부라지기 일쑤라 아침저녁으로 물 주기를 게을리해서도 안된다. 물 주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 오이 기르기보다 쉬운 게 어디 있느냐고 하는 이도 있지만 그 쉬운 게 나는 어려워서 해마다 아쉬웠더랬다.
올해는 오이 풍년이었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 개씩, 며칠 지난 후에는 세 개씩 땄다. 소금을 한 줌 쥐고 가시 돋친 오이 표면을 문지를 때의 저릿한 아픔을 기억하는지. 갓 딴 오이라 그런지 가시가 유난히 날카롭고 뾰족해서 오이를 닦을 때마다 손바닥이 데이는 것처럼 아팠다. 상추와 함께 겉절이를 하기도 하고, 두어 번은 오이소박이도 담갔다. 오이 피클, 오이 간장 장아찌, 절여서 감자 샐러드에 넣기도 하고 깍두기 담듯이 버무리기도 했다. 장마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붓던 폭우 속에서 오이는 신기할 정도로 잘 자랐다. 한 번에 일곱 개를 딴 적도 있으니 보기는 좋았으나 그 많은 걸 어떻게 먹나 고민도 되었다. 장마 끝나고 폭염이 이어지자 오이도 지쳤는지 더 이상 꽃이 피지 않았다. 누렇게 변한 오이덩굴을 걷으려고 보니 늙어버린 오이 세 개가 매달려있었다. 그게 오늘 아침의 노각이다.
내일은 참여하고 있는 수필 앤솔로지의 원고 마감일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마지막이 어렵다. 보고 또 보고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우기를 몇 번일까. 모니터에 떠 있는 글자 위로 노각이 아른거렸다. 쓰기 싫으니 그렇지, 하면서도 벌떡 일어나 후다닥 내려갔다. 노각은 껍질을 벗겨 먹으니 소금으로 문지르는 대신 감자칼로 껍질을 벗겼다. 하얀 속살이 고운데 한창때 오이의 그것처럼 싱그러운 향을 가졌다. 씨를 긁어내고 나박나박 썰어 굵은소금을 뿌렸다. 뽀얗고 매끄러운 노각에 보송한 하얀 소금이라니. 노각을 절이는 십 분 동안 양념을 만들었다. 고춧가루, 고추장, 다진 마늘, 설탕이 전부다. 쪽파가 없으니 대파를 갈라 쫑쫑 썰고 깨소금을 갈아둔다. 절여진 노각을 찬물에 헹군 다음 물기를 짠다. 그게 제일 어렵다. 손목에 힘주기가 어려워진 후에는 더 그렇고. 어쩔 수 없다. 거즈를 몇 겹으로 접어 그 사이에 절인 노각을 놓고 눌렀다. 마른 거즈가 용케도 일을 잘한다. 어느 정도 물기를 거둔 후에 양념을 넣고 무쳤다. 하얀 노각이 붉게 물들면 깨소금과 참기름을 더하고 마지막에 초록 파로 모양을 낸다. 맛은? 심심하다.
글도 오이가 노각이 되듯 자연스럽게 써지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