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이나 울프를 책장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
어느 해 여름, 휴가에서 돌아오다가 박경리 문학 공원에 들렀다. 이런저런 지면에서 익히 봐왔으나 좀처럼 들르기 어려웠던 곳이었다. 작품 <토지>의 페이지들을 펼쳐놓은 전시관에서 전율했다. 여전히 살아서 퍼덕이는, 날카로운, 매섭고 차가운, 무자비하고 따뜻하고 보드라운 문장들이, 한 문장을 읽으면 다음 문장을 기억할 만큼 토지에 빠져서 살았던 오래 전의 기억들이 너무 생생했다. 한 페이지 남짓 읽는 것에 그쳤으나 돌아와서 며칠 동안 내내 박경리, 박경리, 박경리였다. 오늘 책장 정리하다가 잠시 펼쳐본 [토지]의 몇 장면이 아직도 몸속에 가득 차있다.
책을 읽으며 내 안에 어떤 열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될 때가 있다. 때로는 작가의 취향과 관심사가 나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기뻐서 그 페이지를 읽고 또 읽다가 그 작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버리기도 한다. 어떤 장면은 내 속에 오래 남아 마치 내가 그 일을 직접 겪은 것처럼, 거듭 떠올라 마침내 진짜 '내 일'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이렇듯 어떤 책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 가끔 내가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일까 의심스러울 때도 있음을 고백한다.
예를 들면 댈러웨이 부인이 허리춤이 뜯어진 드레스를 직접 수선하는 장면 같은 경우다. 버지니아 울프는 평온하게, 차분하고 고즈넉한 기분으로 하는 바느질이 여름날 파도들이 층층이 쌓였다가 균형을 잃고 무너지는 것과 같다고 썼다. 이후 나는 바다에 갈 때마다 드레스를 수선하는 여인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바다에 다녀온 지 한참 지나서일까. 요즘은 그와 반대로 버지니아 울프를 읽을 때마다 바다를 떠올린다. 켜켜이 쌓인 일상의 부산물 - 서러움, 분함, 질투, 욕심, 허전함, 분노, 찌질함, 비겁함, 허영심, 시기심 등등 - 들이 밀려들어온 파도에 휩쓸려 먼바다로 흘려나가 버린 것처럼 바다에 다녀오면 몸이 가벼워지곤 했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책이 독자를 만나면 살아나서 변화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은 내가 거듭 읽어온 한 권의 책에 대한 인상이 나 자신의 자서전일 수도 있다는 뜻일 것이다. 언제쯤이나 되어야 버지니아 울프를 책장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 그리하여 그녀가 본 것을 보았을 때 더 이상 그녀가 보고 느낀 것을 말하는 대신에 내 스스로 느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내 눈으로 직접 발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