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Sep 09. 2024

독서는 내가 완전히 없어지는 일

슈테판 볼만, 여자와 책

                                                                                                                                                                                                                                                                     

  고등학교 시절 일주일에 한 번씩 해야 했던 숙제가 있었다. 일간 신문의 사설을 공책에 오려 붙이고 핵심문장에 줄 긋기, 그리고 사설에 나온 한자를 익히기. 숙제는 싫었지만 신문 읽기는 즐거웠다. 이른 아침 아직 따뜻한 신문을 받아 들고 설레던 느낌은 손에 느껴지던 신문이 묵직할수록 더해졌다. 신문이 무겁다면 그만큼 읽을거리가 많다는 뜻이니까. 신문지를 잡은 손가락이 잉크로 검게 물들기도 했는데 가끔은 교복 블라우스 소매에도 잉크 자국이 묻어 난감하기도 했다.


  학기 초에 새 교과서를 받으면 제일 먼저 얼굴로 가져갔다. 냄새를 맡기 위해서였다. 채소나 과일처럼 아직 손때가 묻지 않은 새 책들은 신선했다. 종이 냄새, 잉크 냄새 그리고 책 속의 문장들이 가진 냄새, 냄새들. 도서관에서 표지가 낡은 오래된 책을 빼어 들었을 때 나는 냄새도 좋았다. 슈테판 볼만도 그랬던 모양이다.


책은 냄새를 풍긴다. 표지 냄새, 종이 냄새, 잉크 냄새, 접착제 냄새뿐 아니라 시간의 냄새, 책이 적절하게 혹은 부적절하게 보관되어 있던 모든 장소의 냄새를 풍긴다. 막 나온 책이라면 신선하고 싸한 냄새를 풍기고, 오래된 책은 습한 지하실 특유의 큼큼한 냄새를 풍긴다. 시간이 흐르면서 책은 주인의 흔적을 보여준다. 커피나 와인자국, 귀퉁이가 접힌 부분, 찢어진 부분, 종이가 갈변한 부분이 생긴다. 곰팡내가 나고, 표지에 때가 묻고, 뒤틀리기도 한다.         
                                                                       슈테판 볼만, [여자와 책] 중에서     

                                                                                       

 누렇게 변색된 책장을 넘기던 오후의 도서관에서 나는 무엇을, 어디를 꿈꾸었을까? 낯선 세계로 발을 내딛는 중이었는지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도망 중이었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무엇이든 간에 그건 바로 플로베르의 '여행'이자 수전 손택의 '현실과의 행복하고 고무적인 거리두기'였다.


   수전 손택은 독서를 "자기 자신으로 있을 필요가 없는 승리"라고 불렀다. 수전은 독서는 "내가 완전히 없어지는"일이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 "내가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이 독서를 한층 매력적으로, 또한 중독성이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작가의 말이 아니더라도 책을 읽다 보면 지금의 현실이 긴가민가한 형태로 아득하게 물러난다. 내가 지금의 아무개가 아니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가능해진다. 세계가 내게 열려 있다면 어떨까 하는, 다시 한번 백지에서 시작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