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작가의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
오랜만에 만난 편집자가 물었다.
작가님, 요즘 차기작 준비하고 계신가요?
(그냥 웃음)
글은 쓰고 계시지요?
네
저 그거 좀 보여주세요.
그래서 글을 보냈다. 며칠 뒤에 긴 메일이 왔다.
글 한 편 한 편은 아름다우나 그걸 묶어보니 책은 안 되겠단다. 이유는 일관된 콘셉트가 없어서란다. 콘셉트가 없으면 어떤 책인지 설명할 수가 없고, 기획안을 만들 수도 없으며, 당연히 기획회의를 통과하기 어렵고, 어찌어찌 만든다 해도 이 책이 어떤 책입니다 하고 광고하기도 어려우니, 팔기도 어렵다는 말이었다. 쓰고 있는 글들로 책을 만들어야지 했던 건 아니었으나 메일을 읽고 있자니 만약 내게 다음 책을 만들 기회가 주어지면 콘셉트 없는 책을 콘셉트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새싹처럼 꼬물꼬물 돋아났다. 내친김에 다시 물었다. 특별한 일이 꼭 일어나야 하나요? 종일토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심심한 그런 날들을 이야기하는 책 한 권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요? 다시 물었다. 아, 물론 그런 책들도 있지요. 그런데 그런 책을 내려면 유명작가여야 하지요. 박완서나 박경리 같은, 이름만 들어도 아! 그 사람,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요.
내가 무명작가라는 걸 실감하게 해 준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전업주부입니다만]을 만들 때 매 꼭지마다 제목을 붙여야 했는데 그게 참 어려웠다. 그래서 편집자에게 그냥 1,2,3....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제안을 했더니 온라인서점에 책 소개할 때 목차가 1,2,3....으로 나가게 되면 예비 독자들이 이게 무슨 책인가 하고 등을 돌릴 수도 있다고, 뭐 ㅇㅇ 정도 되는 유명작가(정확히 기억이 안남)라면 모르지만요,라는 답변이 왔다. 메일로 주고받았지만 편집자의 난감한 표정이 어찌나 생생한지 두 말 않고 제목을 달아 다시 보냈던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깊이에 눈뜨는 시간]의 제목을 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고른 제목은 [수필] 혹은 [산문]. 이건 지금 생각해도 웃긴데 편집자 역시 그랬을 것이다. 당신이 무슨 피천득 정도 되는 사람인 줄 아느냐고 되물어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서점에 들렀다. 신간 에세이를 모아 놓은 곳에서 새 책들을 구경했다. 아니 그 책들의 콘셉트가 보이는지 살폈다고 봐야 옳다(스스로 이렇게 뒤끝이 있는 사람인 줄 여태 몰랐음). 콘셉트란 게 보이는 책도 있고 안 보이는 책도 있었다. 그중 몇 권은 내 글을 읽은 편집자가 유명작가나 되어야 그런 글로 책을 만들 수 있다고 한 바로 그런 글들,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을 다뤘다. 작가 이름을 살폈다. 모르는 이름이다. 이 책도, 저 책도, 이런 글로 출간을 할 수 있었던 분들이라니 당연히 유명작가일 텐데 나 그동안 뭐 한 거지? 분명 매일 책을 읽었는데, 알라딘 박스가 쌓이고 쌓였는데, 내가 글을 읽는 세상이랑 유명작가들이 글을 쓰는 세상은 다른 세상인가?
메일 말미에는 좋은 소식을 전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이 붙어있었다. 답장을 쓰면서 무명작가라서 죄송합니다,라고 써야 하나? 아니면 무명작가인데 유명작가 행세를 하려고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써야 하나 10초 정도 고민하다가 그냥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