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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Sep 11. 2024

명절은 누가 만들었을까

   가을인가 싶었는데 다시 덥다. 제때 거두지 않아 그대로 말라가는 고추가 반질반질하다. 문득 오후인가 싶어 고개를 들면 저녁 어스름이 어느새 다가와있다. 구월 달력을 벽에 붙여놓고서도 시간 가는 게 왜 이렇게 빠르냐고 중얼거릴 뿐, 새로운 계절로 들어선 걸 실감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데크 위에 뭔가가 떨어져도 그게 뭔지 궁금하지도 않고, 씨만 남은 채송화 줄기가 말라가는 걸 보고서도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모르는 새 부추 꽃이 화사하게 핀 걸 보고 이게 무슨 사태인가를 궁금히 여길 리가 없다. 모두가 가을이 벌인 일인 걸. 그런데 덥다. 가을인데 덥다니. 추석이 코앞인데.

  우체국에 다녀왔다. 작은 우체국이라 낯익은 직원들이 반갑다. 언제부턴가 무인접수기가 생겼다. 기계에 서툰 내게서 우편물을 받아 들고 시범을 보이던 분이 명절준비는 잘 돼 가냐고 묻는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요, 얼버무리는데 내 대답 같은 건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던 그분, 말을 이어간다.


"명절은 참 자주 와요. 올해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길에 갇혀있을까, 일찍 가면 일이 많고, 늦으면 눈총이 많고, 명절은 누가 만들었을까, 정말 싫어."


  마주 보고 웃으며 추석 잘 쇠라 인사를 하고 나왔다. 명절은 누가 만들었을까, 그 말이 내게 붙어버렸다. 종일 고개를 돌릴 때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명절은 누가 만들었을까 노래 후렴구처럼 따라붙는다.


  설날이며 추석이 좋았다. 명절 준비는 왜 맨날 나만 하느냐고 툴툴거리면서도 며칠 전부터 장을 보고 음식 만들 순서를 메모했다. 일하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는 엄살, 누가 설거지라도 해줬으면 좋겠다는 헛된 바람들을 양념처럼 섞어가며 나물을 불리고 고기를 다지다가 중간중간 떨어진 식재료나 깜빡 잊고 준비하지 못한 물건들을 사러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서는 걸 되풀이하는 날들이 신났다. 시장에 다녀와서 식재료들을 냉장고에 통째로 밀어 넣고 오늘은 피곤해서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중얼거림을 변명으로 남기고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가도 어차피 할 일, 다시 일어나 느릿느릿 메모를 한 줄씩 지워가는 것이 내가 명절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해가 지나면서 요령도 생기고 일도 줄어 부담은 줄었지만 어쩐지 명절 기분도 줄어 하루하루 추석 다가오는 게 예전 같지 않다.


   집 뒤편에 창문 두 개와 문 하나가 있다. 세탁실 문, 세탁실 창, 서재의 창이다. 영화 [내 사랑]에서 모드는 창문을 좋아한다고 했다. 날아다니는 새도 보이고 꿀벌도 보인다고. 자신의 인생 전부가 이미 액자 속에 있다고. 붓 한 자루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가끔 서재에서 창밖을 바라볼 때가 있다. 새도 보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보인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면 그것도 보인다. 달이 뜬 날, 방의 불을 끄면 달빛이 나무 그림자를 끌고 방안에 들어온다. 모드처럼 나도 그게 좋다. 며칠만 지나면 저녁때마다 이지러진 달이 떠서 조금씩 차오를 것이다. 욕심을 버렸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보이느냐 물어봐야지. 매사에 늦는 것은 알지만. 지나고 나서야 좋았고 힘들었던 걸 알게 되고 잃어버리고 나서야 귀한 것이란 걸 눈치채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걸 보고서야 아팠던 걸 알게 되고. 옛날처럼 그런 나를 보고 말해주려나. 그대로 괜찮다고. 작은 언덕을 하나씩 넘고 좁은 골목을 비척비척 빠져나가면서 이렇게 나이가 드는데.


   라벤더가 다시 꽃대를 올리고 수세미도 노랗게 꽃이 피었다. 오이와 호박, 프록스와 쑥부쟁이를 걷어낸 마당이 훤하다. 여름 끝자락부터 어수선했던 마음이 이제는 자리를 좀 잡을까. 명절은 정말 누가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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