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편지

by 라문숙


집에 돌아오면 현관문을 열기 전에 우편함을 확인한다. 요즘 세상에 무슨 우편물이 온다고 그러느냐 의아해하던 식구들도 이제는 오랜 습관이려니 여기는 눈치다. 거의 비어있는 우편함을 눈에 띌 때마다 열어보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어느 여름인가 우글쭈글 쪼그라든 채 말라버린 편지를 발견했다. 우편함 속에서 비에 젖었다가 뙤약볕에 마르기를 거듭했는지 움켜쥐면 그대로 부스러질 것 같았다. 바닥에 얼어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우편물을 잡아떼다가 봉투가 찢어졌던 때도, 내용물의 일부가 찢어져서 몇몇 글자가 사라진 명세서나 고지서를 발견했을 때도 그토록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진짜 편지였다! 우편함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긴 건 아마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십여 년 전부터 잊을 만하면 도착하는 그 편지는 실제로 만난 적이 없는 한 독자로부터 온다. 그녀는 봉투에 단정한 글씨로 나의 이름과 주소를 적고 그때그때 다른 모양의 우표를 붙여 보내준다.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직접 쓴 편지라니. 대부분 연락은 문자나 메일로 주고받으므로 편지라는 사물 자체가 흔치 않게 된 지 벌써 오래가 아니던가. 게다가 손으로 썼다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정하고 고른 글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편지지가 몇 장이나 되었다. 편지를 손에 쥐고 낯선 사물을 바라보듯 당황했고 나란한 글자들에 압도되어 허둥댔다. 내용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어 집 앞 골목길에서 우연히 만난 동네 친구와 안부를 주고받는 것 같았지만 읽어 내려갈수록 마음이 차분해지는 힘이 있었다. 주로 카페에서 편지를 쓰는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작은 꽃병을,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를, 그날 주문한 커피와 케이크를 이야기했다. 오는 길에 마주친 사람이나 꽃을 피우기 시작한 가로수,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도 알려주었다. 금목서 향기가, 유학 중인 아이가, 최근 읽은 책이, 그날 다녀온 마트의 풍경이 어땠는지 써 내려간 편지 속에서 그녀는 단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첫 편지의 놀라움은 차츰 가라앉았으나 어느덧 편지에 담아 보낸 그이의 시간을 엿보는 즐거움에 매료되어 요즘은 하마 편지가 도착할 때가 되었을 텐데, 하며 기다리기도 한다.


얼마 전 책장 아래 놓여있던 종이상자들을 정리하던 중 오래전 그녀에게 받은 편지들을 발견했다. 무심코 집어든 봉투를 열어 글을 읽다가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눈물이라니. 그것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흩어진 편지들을 바라보며 터진 눈물은 뜨거웠다. 편지지를 고르고 펜을 선택하는 것으로 시작해 글을 쓰고 주소를 적은 후 - 가끔 작은 그림을 그려주기도 한다 - 우표를 붙여 우편함에 넣기까지의 과정이 온전히 나를 향한 것이었다는 깨달음이었을까. 특별한 내용이 없는 게 아니라 편지 자체가 이미 특별했음을 뒤늦게 알아챈 이의 부끄러움도 섞였을 것이다. 한동안 망연하던 나는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편지가 도착하면 그녀의 블로그에 가서 글을 남기거나 카드에 짧은 글을 적어 보낸 것이 전부였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쓴 편지, 그러니까 그녀가 내게 보내준 것처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안심과 평온이 덩달아 깃드는 편지를 써보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실패했다. 편지지 앞에서 끙끙거리다가 포기하거나 반쯤 채워진 편지지를 구겨 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오래전이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썼던 시기가 있었으므로 그 일은 매우 놀라웠다.


학기 중 내내 붙어 다녔던 우리는 방학이 되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편지를 썼다. 매일 오후 우편배달부가 다녀가면 대문 안쪽으로 편지봉투가 떨어졌다. 편지를 받은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편지를 썼다. 지난밤 쓴 편지가 골목길 끄트머리 구멍가게 옆 빨간 우체통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후련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며칠에 한 번씩 문구점에서 편지지와 봉투묶음, 25 장 짜리 전지 우표를 샀다. 한동안 편지가 오지 않아 맴을 도는데 우편배달부가 노란색 고무줄로 동여맨 편지 한 묶음을 건네면서 일부러 모아 가져왔다고 너스레를 떤 날도, 밤에 쓴 편지를 다음날 우체통에 넣었다가 몇 시간 동안이나 편지를 수거하러 오는 이를 기다린 날도 있었다. 친구가 그 편지를 읽는 일만큼은 절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절박했던 마음과는 달리 정작 내가 썼던 편지에 담긴 내용은 기억에 없으니 떠올릴 때마다 헛웃음이 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마음이 온통 편지에 쏠려 있었던 그해 여름은 웬일인지 불안했고 가을에 재회한 우리는 편지 속에서 만났던 서로가 아니어서 한동안 서먹해하다가 차츰 소원해지고 말았다.


오래된 편지들을 읽다 보니 그 여름의 편지들이 다시 떠올랐다. 함께 주고받았던 그 많은 편지들에도 불구하고 다시 마주했을 때 우리가 그토록 낯설었던 건 편지를 읽으며 빚어낸 상대방의 모습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란 뒤늦은 각성이었다. 편지를 쓰는 이가 전하고 싶은 말이 읽는 이에게 온전히 가 닿을지 염려하지 않았고 제대로 읽어냈는지 돌아보지도 않았다. 편지가 시공간을 넘나든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편지는 용기 있는 이들의 도구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편지를 읽는 즐거움이 줄어들지 않는 건 우리가 편지에서 읽고 싶은 것이 '새 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해내고 갖게 되었는지가 아니라 다만 '잘 지내는지'가 궁금하다. 편지에는 효용이 아니라 호사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훗날이야 어찌되었든 편지를 써서 보내고 받아 읽으며 보낸 그 여름이 행복했던 이유다.


그녀가 보낸 편지 봉투에는 각기 다른 날에 쓴 편지 여러 장이 함께 들어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편지 속 정성 들인 글자들에서 내가 읽어낸 건 여전한 평온함이었다. 특별하거나 새로운 소식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세계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녀가 편지를 쓰는 것은 삶을 사랑하는 한 방법처럼 보인다. 그동안 받은 편지들로 추측해 보건대 그녀의 편지를 받는 이는 여러 명이었다. 그녀는 펜을 든 순간부터 글을 마칠 때까지의 시간을 즐길 줄 알았다. 받는 이가 누구든 한결같은 편지를 쓰는 그녀가 자신에게도 편지를 쓸까 상상해 본다. 어느 날, 편지를 쓰다가 문득 누군가의 이름 아래 쓰고 있는 그 글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떨까. 그러니까 어느 가을날 오후의 나처럼.


두어 해 전 한 고택에서 방문객들이 쓴 편지를 보내주는 이벤트가 함께 열렸다. 나는 가을볕 아래 편지를 쓰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내가 쓸 편지를 받을 이의 주소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편지를 보내고 싶은 친구의 장례식을 치른 게 며칠 전이었다. 쓸 수야 있겠지만 어디로 보낸단 말인가. 편지는 닿을 곳이 있어야 한다는 이치가 그날의 내게는 불가능한 숙제였다. 고택 주인의 손녀라던 초로의 여인이 다가왔다. 사정을 들은 안주인은 스스로에게 써 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고택의 주소를 보내는 이의 주소로 적어두면 세월이 지난 후에라도 이 날을 기억할 수 있지 않겠냐며 자리를 뜬 그녀의 뒷모습에 눈이 시렸다. 그날 쓴 편지는 그때까지의 내가 지금의 내게 보내는 고백이자 앞으로의 내게 보내는 다짐이었다. 독백이자 일기인 셈이었다.


작정을 하고 펜을 들었으나 편지를 쓸 수 없었던 이유는 나 역시 그녀에게 반듯하고 평온한 일상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내게서 온 편지를 받은 그녀가 편지에 무엇이 담겼는지 궁금해하는 대신 단지 기쁘면 좋겠어서였다. 그녀가 부릴 줄 아는 마법 - 조그만 사각봉투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행복해지는 - 을 엿본 이의 섣부른 욕심이었다. 이제 길지 않은 편지를 쓰려고 한다. 내 방식대로 살고 사랑하는 모습이 담길 편지는 아주 조금씩 충만해질 것이다. 그녀가 편지 속에서 느리지만 단단하게 여물고 있는 날들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25년 12월에 받은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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