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e Little Day - 어느 멋진 날

엘리사베트 둥케르

by 라문숙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단지의 평수가 조금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살던 집이라 손 볼 곳이 많았고 이제 이사는 안 하겠다고 마음 먹었던지라 집 전체를 고치겠다는 마음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볼 수 있겠다 싶어서 페인트나 벽지, 주방 가구와 커튼 등을 보러 다니기 시작할 때는 지금 생각해도 즐거웠다. 문제는 그것이 단지 시작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것. 내가 고른 벽지는 너무 싸구려라 집의 품격이 떨어져 보인다고 했고 내가 고른 창살의 페인트 색상은 금방 싫증이 난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주방은 공사가 너무 복잡하고 또 내가 원하는 욕실 디자인은 아무도 안 하는 거라고 했다. 무엇보다 나를 질리게 만든 건 집값이 떨어진다는 소리와 나중에 집이 안 팔린다는 소리였다. 이제 이사는 안 갈 거고 그러니 집값이 떨어지고 집이 안 팔린 들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내 말에 귀기울여주는 인테리어 업자는 없었다. 공사를 맡은 분들이 할 수 없다고 나가 떨어지는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나는 잔꽃무늬가 들어간 주방도 포기하고 초록색 창틀도 포기하고 반짝이는 유리 타일도 포기하고 시원스레 넓은 하얀 아파트를 갖게 되었다. 그 덕인지 그 후로 이사를 한 번 더 해서 이 집으로 왔으니 그때 나를 그렇게 말리던 분들께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할까?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오르게 해 준 책을 만났다.

'Fine Little Day - 어느 멋진 날'이다.




누군들 멋있게 살고 싶지 않을까? 남이 보기에 멋스러운 게 아니라 스스로 멋있다고 느낄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때 하면서 사는 것,

좋아하는 물건들로 주변을 채우고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거기에 운도 좋아서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을 갖게 되고 사업도 잘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춥고 비좁은 낡은 오두막에서 심심하고 불편해서 심술이 난 아이들과 겨울을 보내기 위해 기꺼이 안락과 편안함을 버릴 수 있다면?

그녀는 멋진 여자다.



모든 것은 블로그에서 시작된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한 여자가 '일상의 몽상을 즐기기 위해 들어가는 동굴'같은 블로그를 만든다. 세상 곳곳의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하루하루를 좀 더 섬세하게 다듬을 수 있는 그 곳에서 즉흥적이고 어수선하고 정리 안 되고 목록화도 안 된 글과 사진들을 올린다. 우연한 계기로 온라인 숍을 운영하게 되고 주목을 받게 되고 그리고 갑자기 버터와 빵을 맘껏 살 수 있게 되고 집세도 걱정 없이 낼 수 있게 된다. 그녀는 이 모든 일을 자유롭고 즐겁게 해냈다. 그래서 걱정도 없고 이해타산을 따지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우연이고 그녀는 다만 운이 좋았던 것일까?



이 책은 글이 많지 않다. 디자이너인 저자답게 사진들로 대부분의 페이지가 채워져 있다. 만약 글을 읽고자 한다면 페이지마다 글자가 있는 곳을 찾아야 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30년 전 엄마와 할머니가 호숫가 주변에서 자라던 갈대풀과 자작나무, 헤더 등으로 염색한 실뭉치로 벙어리 장갑을 만든 이야기, 마음을 사로잡는 도자기며 인형, 레이스, 꽃무늬 원피스, 오래된 책들에 열광하는 수집벽도 털어놓는다. 식탁보와 사용하지 않는 가방천을 이어 붙여서 조각이불을 만들기도 하고 오래된 도일리들을 모아서 커튼을 만들기도 한다. 산책길에 주워온 나뭇잎으로 만든 모빌이며 종이를 오려서 만든 장식품까지, 책장을 넘기다 보니 아, 이건 내가 집안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하고 싶었던 일들의 일부였구나 하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러니 부러울 수밖에. 그녀와 나의 차이점은 뭘까? 디자이너인 그녀가 하는 일들은 내게는 놀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비가 그친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숲으로 갔다. 집 옆의 작을 길을 따라서 잠시 걸었다. 비에 젖은 숲은 미끄럽고 반짝였으며 차갑고 화려했다. 숨쉬기가 편했다. 지난 봄 새싹들과 꽃들을 보았던 자리에 노랗고 붉은 이파리들이 남았다. 성격 급한 아이들은 어느새 잎을 모두 떨구었다. 나무들은 헐벗은 채로 겨울을 날 것이다. 내년에 순한 초록의 이파리들을 다시 내보이기 전까지. 나무에게 마음이 있어 생각할 수 있으면 나는 겨울 나무가 되고 싶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며 헐벗은 그대로 견디어 보고 싶다. 얼마만큼 견딜 수 있는지. 그걸 용기라고 부르면 이 책의 저자, 엘리사베트 둥케르는 이미 용기 있는 여자다. 그녀가 말하기를 '누구든 책장을 넘기면서 조금이라도 자극을 받고 삶에 대한 용기를 얻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에게 말해줘야지. '당신은 성공했어요. 그래서 고마워요.'라고.



그녀는 스스로 부족한 점이 많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세상은 하루하루 삶의 연장선이고 일상의 연속이니 부족함도 즐기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다. 그러니 그녀가 부러운 이들은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많은 용기를 매일 채우고, 모자라는 자신을 다독이며 스스로를 인정하고 하루하루 자신이 주인공인 삶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숲과 마당에서 꺾어온 작은 열매들로 잠시 놀았다. 넝쿨장미, 찔레, 작살나무, 란타나의 열매다. 그녀의 말대로 여가를 보내는 양질의 방법이다. 거실에 깔아놓은 여름이불 위에는 결혼하고 이십오 년이 지나는 동안 주방에서 보낸 시간들이 짝이 안 맞는 찻잔, 금이 간 접시, 색이 변해버린 밀폐용기들로 남아서 쌓여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직 이렇게 작고 예쁜 열매들을 찾을 수 있어서 즐겁다.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여야 만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해서 스스로가 대견하다. 오늘 내가 어제보다 마음에 들어서 기쁘다. 여전히 내가 나일 수 있어서 즐겁다. 내일이 있어서 행복하다. 책이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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