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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티 정문선 Apr 27. 2020

[책 리뷰]'먼바다'를 읽고서

“먼 바다라고는 해도 물이 그리 깊지는 않았던 것 같다.”로 40년 전의 짧은 기억으로 시작된다. 먼 바다는 아픈 사랑을 간직하게 하는 공간이자 동시에 사랑을 연결해주는 상징성을 지닌다. ‘먼 바다’ 속에 깊이 침잠해 있는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서로 다르게 편집된 기억들을 끊임없이 되새김하며 진실 퍼즐을 맞추어 간다.  그들은 드러내는 사랑을 하지도 못한 채 사랑이 정지된 채로 각자의 인생을 살았다. 사랑의 회복으로 이어지기까지 40년 동안 안타깝게 방황했던 것이다. 마치 유대인이 3일이면 갈 수 있는 곳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맸던 것처럼.

 

  문명의 발달은 운명적 만남을 돕는다. 대학교수인 미호(로사)는 동료 교수들과 미국 학회에 가면서 우연히 페이스북으로 연결된 40년 전의 첫사랑과 연락이 닿으면서 그와 그의 여동생과 보내는 시간 속에 오래전 기억들이 소환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성당에서 만난 그(요셉)와는 드러낼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을 하게 된다. 성당 중고 수련회에서 함께 보냈던 추억은 그녀에게는 잊어야만 하는 망각이 되고, 그에게는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되어 살아가게 한다. 그녀에게 떠오르는 생생한 기억은 어두운 레스토랑에서 그와의 결별이었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군대에 다녀온 후 다시 대학에 들어갈 테니 3년을 기다려 달라”는 그의 폭탄 고백에 당황하며 거절했던 순간이 평생  동안 그녀를 괴롭혔다.     

  

  미호와 그의 가족은 유신 시대의 비극을 부둥켜안은 채로 살아간다. 그녀의 아버지는 1970년대에 박정희를 비판하는 드문 지식인으로 정부에 낙인찍혀 고문을 당한 후 후유증으로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 아버지의 병치레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내몰고, 아버지의 죽음은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가게 된 독일의 유학생활이 그를 만날 수 없는 공간 속에 머물게 하고 각자 다른 가정을 꾸미고 살아가도록 만든다. 비록 독일에서도 그에게 편지를 부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에게는 전해지지 않는다.    


  미국에서 만난 40년 만의 재회 속에서 자연사 박물관, 메모리얼 파크 등을 다니고 저녁을 함께 하면서 오래전 과거의 파편들을 더듬어가며 하나둘 씩 과거의 기억들과 마주하게 된다. 한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잠들었던 기억을 깨울 수가 있음을 보여준다. 먼 바다의 기억이 정지되었던 그들의 사랑을 다시 움직이도록 돕는다. 그 바다는 잃어버린 기억과 순수했던 사랑을 푸는 열쇠였다.     


  읽는 동안 미호의 마음이 느껴져 아프기도 하였고, 독일에서의 힘든 생활에 감정이 이입되어 울컥하기도 하였다. “지금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상처는 사람으로 생기지만 치유는 사랑으로 메워짐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좋은 글은 심연에 덮어두었던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씩 건져 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어쩌면 과거로 소환하여 과거의 아픈 기억을 이해하고 감쌀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지났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날씨가 춥죠? 하고 말하는 것 외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니.”라는 어머니의 말처럼 사랑은 어두웠던 무채색의 아픈 과거를 다시금 여러 빛깔로 채색하게 만드는 힘이 있음을 배웠다. 한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고 서로 상처를 보듬어가며 부족함을 채워갈 수 있는 지금이 감사하다.

       

  허구라고는 하지만 작가의 경험의 깊이와 섬세한 표현들에 동화되며 감수성이 더 깨어나는 좋은 자극을 받았다. 마법의 지팡이로 표현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고백한다. “내 살아온 뼈를 조금씩 녹여 잉크를 만드는 것 같다. 토막 난 시간은 그저 헛되었고 긴 시간은 훌렁 자루로 뒤집어써야 토끼똥처럼 찔끔거리며 문장이 떨어져 내리기에 사람으로서 도리도 못 하고 사는 날이 많았다”라며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아파보았기에 아픔을 알고, 방황해보았기에 허무의 몸짓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을 시간에 숙성되게 가면서 사람다워지는 모양이다. 의문은 들었다. “한 기억으로 평생을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한가?”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임의로 편집하여 형상화하기에 첫사랑은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이성과 상식을 초월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유가 없다. 그러기에 좋은 문학작품을 읽으며, 지금의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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