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 지 2달째가 되어간다. 잘 쓰고 싶었다. 그러나 욕심이었다. 조급함이 앞섰다. 노력한 것 이상을 늘 바라는 어리석음도 있었다. 대가를 이룬 사람들은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노력과 절제하는 고통을 견디어 내었을 것이다.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에서도 인생의 모진 풍파를 담아냈다. 인생이란 혼자서 짊어지며 감당해야 할 많은 몫들이 있다. 태풍, 천둥, 번개가 나를 영글게 하고 밤, 땡볕, 초승달이 나를 완숙하게 만들 것이다.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안에 태풍 몇 개
저안에 천둥 몇 개
저안에 번개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안에 땡볕 두어 달
저안에 초승들 몇 날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악기 연주를 통해 배운 것들
유년 시절부터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중가요는 종종 따라 부르기는 했지만 음악 점수는 항상 바닥이었다. 성적은 ‘수우미양가’ 중 선방하면 미를 맞고 보통은 양이었다. 나에게 음악 과목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음악에 대한 주저함은 나를 따라다녔다. 올해 교육기간에 대담하게도 취미과정은 기타를 선택했다. 듣는 음악에서 즐기는 음악을 하고 싶어서였다. 기초가 없던 터라 첫 시간부터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노래방에서 음정 박자 무시하고 목청껏 부르는 것이 전부였던 나에게 기타를 배우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2달이 지나자 자신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괴감에 포기할까 생각도 들었다. 배운 경험이 있었던 동기들을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무리였다. 의욕만 앞서는 게 능사는 아니다. 후회막급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게 되었다. 해보지도 않은 채 음악을 쉽게 판단해왔던 지난 시절이 많이 부끄러웠다. 모르면서 함부로 재단 하는 일이 얼마나 주제넘은 일이었는지도 배웠다. 미숙한 사람이 괜히 설치다가 일을 그르치는 선무당처럼 기타를 연주하는 것은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4달이 지나자 교육생들 간 실력 차가 확연이 드러났다. 같이 시작했던 동기 한 명은 그동안 기타 연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남모르게 학원을 다니고, 매일 연습에 몰두하자 몇 곡을 자연스레 연주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연주를 들으면서 손마디에 몇 번의 굳은살과 흘렸던 시간의 양이 헤아려졌다.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어떠했을까? 옹달샘과 같은 쉬운 코드를 반복하며 안주하고 있었다. 치열하게 연습하지 않았다. 자가 학습 기간에는 아예 손에서 놓아버렸다. 수업을 받지 못해 그런 것처럼 합리화했다. “난 손가락이 뭉툭해서 치기 불편해”. “기타는 나에게 맞지 않아”라며 핑계만 대었다. 노력하지 않았으니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기타는 그렇게 포기할 수 없는 애증의 관계가 되었다.
잘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3가지
무엇인가를 잘하고 싶다면 3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간절함이다. 스스로 해야 할 이유를 명확히 알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둘째는 기본에 충실하며 계속 연마해야 한다. 마지막은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즐길 줄 알아야 지속하는 힘이 생긴다. 포기하지 않으면 일정 수준까지는 올라갈 수 있다. 비범한 수준이 되려면 한마디로 하고자 하는 일에 미쳐야 한다. 독서는 나에게 세 가지 모두를 주었다.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싶은 간절함, 매일 조금이라도 책을 읽으려고 했던 노력, 읽는 것을 넘어 나누려 했던 다양한 활동을 즐겼다. 비록 독서습관을 만드는데 몇 년이 걸렸지만 기초체력을 만드는 것처럼 담금질하는 값진 시간이었다. 조금 느리면 어떤가?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목표에 가지 않겠는가?
꾸준하게 글쓰기를 시작하다
올해 4월 말에 ‘브런치’를 시작하여 50일 동안 47편의 글을 썼다. 감상 에세이 22, 주제 글 14, 책 리뷰 5, 기타 6편 등 하루 1편 정도의 글을 썼다.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이 되었다. 교육 기간과 코로나 19라는 외부활동을 자제하는 환경은 글을 쓰는데 집중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평소 관심이 있었지만 막연했던 터에 글을 잘 쓰는 선배에게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를 물어보았다. 질문은 씨앗이 되었고,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은 삽이 되어 주었다. 씨와 도구가 있으니 밭에 뿌리고 일구기만 하면 되었다. 먼저 ‘나에 대해 써보기’로 무작정 시작했다.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환경 변화 위주로 구분하여 기억의 파편들을 맞추었다. 아픔과 상처 그리고 많은 추억들은 거미 똥구멍에서 거미줄이 나오듯 뽑혀 나왔다. 몇 시간의 토해냄은 글쓰기 출항을 알리는 큰 고동소리가 되어 심장을 자극했다. 시작의 힘이었다. 그 이후로 글을 쓰면 몇 시간은 훌쩍 지나가곤 했다. 기타를 연습할 때는 금방 지쳤지만 글을 쓰는 것은 비록 힘은 들었지만 피곤하지 않는 즐거운 노동이었다.
초고는 모두 다 걸레다
글감이 떠오를 때도 있지만 기존에 모아둔 자료나 메모해 둔 것을 기초로 쓸 내용을 구상할 때가 많다.
“초고는 모두 다 걸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답답할 때마다 힘을 내어 읽는 문장이다. 아무리 잘 쓴 초고라도 가다듬고 수정하는 작업을 거쳐야 진정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쓴다. 다듬어가는 과정을 반복할수록 글은 매끄러워진다. 글을 읽는 사람은 어쩌면 작가의 정성과 노력을 읽는지도 모른다. 자주 쓰는 단어도 사전을 찾아 확인한다. 더 어울리는 단어, 어색한 표현, 불필요한 접속사, 중복되는 내용, 한자어는 가급적 줄이고, 문장의 순서를 옮겨보는 체크를 한다. 인용하는 문장은 정확한지, 출처는 맞는지도 확인한다. 사진을 넣을 때도 문장과 어울리는지 다시 살핀다.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는 잠시 숙성시키기도 한다.
나에게 글쓰기는 지난한 과정이다. 반면 즐거운 일미며 소통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한 편의 글이 나오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지식 창고에서 재료들이 서로 융합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기록이라는 그물로 잘 사용하는 사람은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잘 잡아두는 현명한 사람이다. 룩스에 따라 빛의 밝기가 다르다. 글을 쓰는 것도 자신의 아는 만큼 쓰게 된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자주 쓰고, 많이 읽고, 생각해야 한다. 더해서 배움에 겸손하며 부지런한 노력뿐이다. 내 것이 아닌 지식은 인스턴트 음식처럼 달콤하지만 건강에는 도움되지 않는 것과 같다. 타인의 지식은 존중하되 인용할 때는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글은 쓸수록 어렵다. 삶과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글은 쓸수록 쉽다. 조금씩 익숙해져서다. 누구나 자신만이 경험하는 고유함이 있어서다. 작가는 글을 쓰는 것에 책임이 따라야 하기에 진실함과 시대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글에는 판단이나 주장보다 근거가 많다. 다짐과 예측은 적고 경험 사례는 많다. 단편적 해설이나 전망보다 믿을 만한 구체적인 근거 자료가 드러나야 고급 정보다.”(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37쪽)
좋은 글이란 어떤 글일까? 글을 읽고 나서 나도 그렇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글일까? 삶과 글이 일치되는 것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일까? 글을 쓰는 사람은 처음부터 타고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앞으로 잘 살 것이라는 글쓰기로 미래를 디자인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삶이 곧 글이 되는 것을 꿈꾼다. 내 경험이 누군가에게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면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글쓰기라는 몰입하는 것을 찾았으니 매일 조금이라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위로와 희망 그리고 사랑을 전하는 울림을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