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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감상] 환자의 기도

서로에게 위로가 필요한 때입니다.

by 모티


환자의 기도

(이해인)


주님

제가 아프기 전에는

당신을 소홀히 하다가

이렇게 환자가 되어서야

열심히 당신을 부르는 제 모습이

비겁하고 부끄럽고 염치없어

숨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용서해 주시리라 믿고

더 열심히 당신을 부릅니다

오직 당신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저의 나약하고 부서진 모습을

가엾이 여겨주십시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 불안, 고독이

밤낮으로 저를 휘감을 때면

저 자신이 낯설고

세상과 가족과 이웃도 낯설고

그래서 힘이 듭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 오면

또 하루를 어찌 견디나 힘겨워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밤이 되면

잠을 설치며 또 다음 날 걱정하는

어리석은 저에게


다시 감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다시 기뻐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다시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저 자신을 받아들이는

인내를 주십시오


저를 담당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단순한 마음으로 신뢰하고

저를 돌보아주는 보호자인 가족과

간병인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아프기 전보다

더 겸손하게 사랑을 넓혀가는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 <햇빛 일기>를 읽다가 이 시에서 멈췄습니다. 아픔의 고통 속에서도 타인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마음, 오히려 고통을 통해 겸손과 사랑으로 넓혀가는 성숙한 사람 되고 싶다는 간구에 숙연해졌습니다. 인간으로서 연약함을 인정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하며 용기, 지혜, 믿음과 인내를 달라는 기도는 고통의 학교에서 새롭게 수련을 받고 나온 학생으로 마치 아픔 곁에 있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 같습니다.


시인은 햇빛이야말로 생명과 희망의 상징이며 특히 아픈 이들에겐 햇빛 한 줄기가 주는 기쁨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햇빛 일기'라고 기도시집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큰 수술 후 회복실에서 듣던 사람들의 웃음소리, 다시 바라다본 푸른 하늘, 미음과 죽만 먹다 처음으로 밥을 먹던 시간의 감사한 설렘 등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며 "아픔에서 한 발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그리 쉽지 않았으나 그런 노력을 구체적으로 할 수 있을 때에만 다른 이에게도 비로소 조금 더 좋은 위로자가 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며 작은 위로, 작은 기쁨, 작은 희망의 햇빛 한줄기로 안길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시집을 읽으며 떠오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건강은 회복되었는지 안부를 물으며 일상을 나누었습니다. 괜찮지 않은 사람은 누군가가 괜찮지 않음을 알아주는 것만으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몇 분과 통화를 하며 그들이 힘든 상황을 슬기롭게 이겨나갈 수 있길 바랐습니다. 안부를 나누는 일, 쉬우면서도 막상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더 늦기 전에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안부 나눔이 곧 기도니까요.

#이해인#햇빛일기#기도#위로#시감상#고통#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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