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산길 그리고 선배와 대화
나를 살린 산길
산길을 걷는다. 12년 전, 그때가 떠오른다. 일의 무게와 사람 관계에 지쳐 ‘우울’과 ‘자책’이 마음을 짓눌렀던 시절이었다. 누구도 만나기 싫어 방 안에만 웅크리고 있던 나를 밖으로 불러낸 건 선배였다. “몸을 움직이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며 그는 산길로 나를 데려갔다.
“난 혼자서 자주 이 길을 걸어. 상황실 근무 끝나면 자주 오는 편이야.”
“요즘은 모든 게 귀찮고, 부정적인 생각뿐이에요. 이유를 모르겠어요.”
“나도 그랬어.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했지. 잠 한 번 푹 자는 게 소원일 만큼 힘든 시절이 있었네. 가장 큰 문제는 혼자 버텼다는 거야.”
“지금 제 심정은… 하수구 터널을 기어가는 기분이에요. 세상이 온통 잿빛이에요.”
“나도 아내가 한참 후에야 알았어. 병원도 다니고 약도 먹었지만,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야. 오히려 산길을 걷는 게 더 도움이 됐지. 그래서 데려온 거야.”
그날 우리는 한참 동안 말없이 걸었다. 사실 선배와 나는 그리 가깝지 않았다. 2년 전,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지만 선배는 옆에 팀장이었다. 선배는 사업에서 부서장과 자주 부딪혔다. 추진력 문제로 몰리던 그는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출근을 접었다. 나와는 불만을 들어주는 정도의 사이였는데, 내 소식을 듣고 나선 것이었다.
자연이 스승 될 때
두 번째 산행에서 선배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난 20대부터 등에 무거운 봇짐을 몇 개씩 지고 살았어. 화목한 가정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더군. 내 자식에게만큼은 충분한 사랑을 주고 싶었지.”
“저는 제가 일을 잘한다고 착각했어요. 평범한 일을 해내려면 몇 배로 노력해야 했는데, 아닌 척했죠. 자존감이 약할수록 남의 평가에 휘둘린다더니, 딱 저였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순간이 있네. 행사기간 때 가족과 식사 중에 자네가 밥값을 계산하며 내 체면을 세워준 적이 있었어. 작은 배려였지만, 아내와 아이들 눈에는 멋진 아빠로 보였을 거네.”
그 후 우리는 주 1회 산행을 이어갔다. 한 달이 지났을 때, 나는 마치 화산이 터지듯 응어리를 쏟아냈다. 선배는 모든 걸 품어줬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몸소 배웠다. 산길이 익숙해지자 혼자 걷는 날도 많아졌다. 고마움에 선배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말했다.
“혼자 와보니 자연 선생님이 명의네요. 걷다 보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운동도 하고, 도서관도 다니고, 자격증 공부도 시작했어요.”
“처음 봤을 때보다 얼굴빛이 훨씬 좋네. 다행이야.”
“선배님, 저를 가족처럼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가장이 흔들리면 가정이 위태롭지. 자네 모습에서 예전의 나를 봤네.”
그의 말은 나의 마음을 깊이 울렸다. 당시 나는 무능한 가장이라 자책했고, 승진보다 건강하게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아내의 말에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우울이란 놈은 참 심술궂어. 심하면 삶까지 부정하게 만들지. 나도 절벽 위에 멍하니 서 있던 적이 있었다네. 가족이 날 살린 거지.”
그의 고백은 내 고통을 비춰주는 거울 같았다. 나 역시 무인도에 혼자 남겨진 듯 버텼다. 팀장에게 몇 번이나 고통을 호소해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말뿐이었다. 쌓여만 가는 업무, 죄송하다는 말이 입에 붙었다. 내 한계보다 50% 이상 달리면 한 달도 버티기 힘들다는 걸, 그때 온몸으로 체득했다.
“직장생활은 일보다 사람 때문에 고통받는 경우가 더 많아. 다양한 빌런을 만나게 되지. 상대에 따라 나를 지킬 줄 알아야 하는데, 능숙하진 못했던 거 같아.”
“저는 제 깜냥을 몰랐어요. 상사에게 ‘할 수 있다’ 고만했죠. 때론 ‘못한다’는 용기도 필요했는데요.”
우리는 직장이라는 현실에 대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과정보다 결과만 중시하는 조직 문화, 상관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평가, 뒤통수를 맞았던 경험들까지… 선배의 경험담은 내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졌다.
길 위에서 다시 시작하다
그 길을 걸을 때마다 선배가 생각난다. 길은 계절마다, 날씨마다 다른 옷을 입고 그 자리에 서 있다. 봄이면 연둣빛 잎들이 햇살에 반짝이며 “다시 시작해 보라”라고 속삭이고, 여름에는 짙은 초록이 지친 마음을 덮어준다. 가을엔 낙엽이 바람에 날리며 성숙한 삶을 말해주고 겨울에는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난 숲이 버림의 미학을 알려준다.
10년이 훌쩍 지나, 나는 아내와 그 산길을 다시 걷는다. 아이들은 어느새 고등학교 졸업과 입학을 앞두고 있다. 내 삶의 속도도 조금은 느려졌다. 선배와 함께했던 추억을 자연스럽게 소환했다. 그의 따뜻한 말들, 나를 품어준 침묵, 그리고 함께 걸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아내는 몇 번의 계절이 지나도 명절에는 꼭 선물을 챙겼다.
얼마 전, 업무에 지쳐 표정이 어두워진 후배와 점심을 먹은 후 뒷산을 걸었다. 후배의 축 처진 어깨를 보니 처음 산길을 찾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선배님은 어떻게 힘든 고비를 버티셨어요?”라는 질문에 잠시 멈췄다.
“함께 산길을 걸어준 선배가 있었어.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었지. 그 선배는 영화의 장면처럼 내게 말했지. 힘든 후배가 있으면 도와주라고”
그 길은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길이지만, 내게는 특별한 길이었다. 그때의 약속처럼 힘들어하는 후배들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 걷자고 말한다. 비록 후배와 걷는 길이 선배와 걷던 그 길은 아니지만 그 일화를 나누며 도움 되길 바랐다.
“힘들 때면 언제든 연락해. 함께 걷자”
산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바람은 매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나는 그 길 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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