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말을 거는 시간

생각을 말로 풀어내기 위한 연습

by 민선미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나는 말수가 줄어든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말들이 동시에 떠오르는데, 막상 입을 열려고 하면 그 말들이 서로 부딪혀 엉킨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


그럴 때 나는 몸을 먼저 움직인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그대로 두고, 일단 밖으로 나선다.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서는 그 짧은 순간에도, 생각은 여전히 뒤죽박죽이다.

몇 걸음 걷다 보면,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조금씩 가벼워진다.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아무 결론도 나지 않았는데, 생각만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내 마음속에는 늘 말들이 가득하다.

그 말들을 말로 풀어내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나는 자주 침묵을 선택한다. 말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고, 말하지 않는 편이 덜 상처 준다고 믿으면서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말을 검열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말이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지, 저 말이 혹시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말하기 전에 이미 여러 번 상대의 자리에 서 본다.


정작 내가 서 있던 자리는 비어버린다.

내 마음은 늘 뒤로 밀리고, 내 감정은 늘 나중 순서가 된다.

점점 더 나에게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타인에게는 꽤 다정한 말을 건넨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네 마음 이해해."

나에게는 좀처럼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엄격해지고, 더 인색해진다.

스스로에게는 유난히 잔인해질 때가 있다.

요즘은 의도적으로 나에게 말을 건다.

아무도 듣지 않아도, 아무도 평가하지 않아도 되는 말인데 이제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많은 사상가들이 걷기를 선택했던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니체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걸어라"라고 했다.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걷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루소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걷기는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정신을 깨워주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면 나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내 이성이 발동하려면 내 몸도 움직여야 한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오래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였구나. 책상 앞에서는 말이 막히고, 길 위에서는 마음이 풀리는 거였구나.

몸이 먼저 움직일 때, 마음도 뒤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셈이다.


아마도 걷는 동안에는 생각이 숨을 쉬기 때문일 것이다. 아스팔트 위를 스치는 신발 바닥의 마찰음, 낙엽을 밟을 때마다 '사각' 하고 부서지는 소리,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잎을 흔드는 소리가 좋다. 그 소리들 사이에서, 나는 비로소 나에게 말을 건다. 숨이 들고 나는 리듬에 맞춰 생각도 천천히 풀린다.


의자에 앉아 있을 때보다, 해야 할 일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보다, 길 위에서는 마음이 덜 긴장한다.

바람이 볼을 스치고, 발자국이 일정한 간격으로 땅을 두드리는 동안, 괜찮은 척 접어두었던 마음이

"사실은…" 하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먼저 말을 건다.

그제야 나는 내 마음을 듣는다.



누군가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그제야 나에게 돌아온다.

"그때 많이 서운했구나."

"그 말이 아직도 남아 있었구나."

"사실은, 너도 위로받고 싶었구나."

나는 그 말들을 붙잡아본다.

도망가지 않게, 다시 삼켜버리지 않게 조용히 침묵한다.

말로 풀어내는 연습은 어쩌면, 나를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나를 허락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느껴도 괜찮다고, 이렇게 생각해도 괜찮다고, 나에게 먼저 말해주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 자주 "그 정도는 참아야지"라고 말한다.

너무 자주 "그건 별일 아니야"라고 정리해 버린다.

사소하게 밀어낸 감정들이 쌓여서, 어느 날 이유 없이 지치고, 이유 없이 울컥한다.

말하지 않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뿐이다.


나는 요즘, 나에게 묻는다.

"지금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뭐야?"

그 답을 급하게 다듬지 않는다.

예쁘게 만들지도 않는다. 어른스럽게 포장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대로 두려고 한다. 미완성인 채로, 서툰 채로, 날것인 채로 완성시키지 않는다.




해 질 무렵, 나는 혼자 걷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조금 웅크린 채로, 특별히 갈 곳 없이 길을 따라간다.

누가 보라고 걷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 쌓인 생각들을 데리고 천천히 이동한다.

발자국 소리에 맞춰 마음도 한 칸씩 앞으로 나아간다.


아직도 나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여전히 생각은 많고, 표현은 더디다.

여전히 말하기 전에 망설이고, 쓰기 전에 머뭇거린다.

적어도 이제는 안다. 말로 풀어내지 않으면, 마음은 점점 굳어진다.

나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걸어줘야 하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도 나는 연습한다.

내 마음을 말로 풀어내는 연습은 조금 느려도 괜찮고, 조금 서툴러도 괜찮다.


길 위에서, 나는 나에게로 돌아온다.

바람에 머리칼이 흔들리고, 발걸음이 리듬을 찾는 동안, 나는 오늘도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건다.

"그래도, 잘 버텼다."

그 한 문장을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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