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인가, 아니면 가족의 행복인가
스무 편의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 나 자신 곁에 머물러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써보고 싶어서 시작한 연재였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 질문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해졌으며, 마지막 화를 쓰는 지금에 와서는 이 질문들 덕분에 내가 나를 함부로 지나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하게 된다.
이 연재는 나를 설명하기 위한 글이 아니었다. 잘 살아왔다는 증명도, 괜찮은 어른이라는 보고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앞에 앉혀두고 조금 늦더라도 솔직해지기 위한 연습이었고, 쉽게 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지금은 모르겠다고 말해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시간에 더 가까웠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 스스로와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매주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으려 애쓰는 동안 나는 더 많이 말하게 되었고, 그만큼 더 많이 멈추게 되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외면해 온 감정이 무엇인지, 그것들을 글로 꺼내놓으며 조금씩 선명해졌다.
예전의 나는 생각보다 먼저 말했고, 마음보다 앞서 행동했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내 안에서 먼저 대답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서두르지 않고, 단정하지 않고,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 애쓰는 쪽으로 한 발 옮겨왔다.
마지막 글을 앞두고 그동안의 소회를 먼저 꺼내야 할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다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아마 이 연재의 시작과 끝은 모두 질문이어야 한다고, 그래야 나답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나에게 묻는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가.
나의 행복인가, 아니면 가족의 행복인가.
이 질문은 늘 나를 머뭇거리게 했다. 나를 먼저 생각하면 어딘가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았고, 가족을 먼저 떠올리면 나는 늘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 있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어른스러운 선택이라고 오래 믿어왔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나는 나의 행복과 가족의 행복이 같은 방향이라고 믿었다. 나의 행복은 따뜻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고, 따뜻한 가정을 만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식탁에 둘러앉아 별일 없는 하루를 나누고, 아이들의 숙제를 함께 들여다보고, 저녁이 되면 불을 하나씩 끄며 집 안의 온도를 확인하는 일을 좋아했다. 가족이 내 삶의 우선순위였다. 그런데 따뜻한 가정을 만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혹시 나는 엄마로서만 인정받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엄마라는 이름으로 나의 다른 얼굴을 천천히 지워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어느 순간부터 '민선미'라는 이름보다 '엄마'라는 호칭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누군가 나를 찾을 때도, 나를 부를 때도 항상 엄마였고, 아내였고, 며느리였다. 그 역할들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점점 희미해지는 기분을 애써 외면했다.
누군가는 욕심이 끝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가치관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인정욕과 성취도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몇 년 전부터 민선미를 되찾기 위해 버둥거렸다. 글을 쓰기 시작했고, 혼자 있는 시간을 필요로 했고, 내 이름을 다시 부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런 나를 낯설어하거나 못마땅해했다. 엄마는 언제든 필요할 때 있어야 하고, 부르면 바로 와줘야 하는 존재라는 암묵적인 기대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어왔다는 사실도 그제야 깨달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엄마와 일을, 가족과 나를 겸해서 살아왔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렇게 허전하지는 않았을까. 어느 날 문득 '내가 사라진 것 같다'는 기분에 이렇게 오래 머물지는 않았을까.
왜 사람들은 두 가지를 다 욕심내면 안 되는 걸까.
왜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미뤄야만 하는 걸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계속해서 포기하는 연습을 하는 일일까, 아니면 늦게라도 나를 다시 데려오는 용기일까.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성취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누군가는 안정된 일상에서 숨을 고르며, 또 누군가는 여전히 설렘과 자극을 통해 살아 있다는 감각을 붙잡는다. 나는 그 사이 어디쯤에서, 나에게 맞는 속도를 찾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때 읽게 된 책 한 권이 내 마음을 조용히 붙잡아 주었다.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상하게도 문장보다 사람이 먼저 떠올랐고, 이 이야기를 혼자만 읽기보다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떠올려보니 그 얼굴들 사이에는 유난히 가족의 얼굴이 많이 겹쳐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조금씩 따뜻해졌고, 그동안 너무 익숙해서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던 가족이라는 존재를 다시 천천히 바라보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특별할 것 없는 식탁에 둘러앉아 각자 하루를 마무리하던 시간이었다. 대단한 이야기가 오간 것도 아니고,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무심하게 "오늘은 어땠어?" 하고 물었고, 짧은 대답이 돌아온 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도 그 시간이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고, 말이 많지 않아도, 서로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느슨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게 바로 그 책에서 말하던 조용한 행복이구나.
우리는 결국 나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고, 자라온 환경의 영향을 깊이 받으며, 그 환경은 우리가 사회로 나가기 전에 살아 견딜 힘을 기르는 첫 번째 연습장이 된다. 그 연습무대가 어떤 곳이었느냐에 따라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도,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의 방향도 놀라울 만큼 달라진다.
"그럴 수도 있어."
"넌 꼭 할 수 있어."
"괜찮아, 다시 시작해 봐~"
이 문장을 듣고 자란 사람은 정말 다르게 어른이 된다. 인정받은 기억과 용기 받은 경험은 위기의 순간마다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가족은 완벽하지 않지만, 우리가 처음으로 인정받고 실패해 보고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운 가장 오래된 연습무대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는 나의 행복과 가족의 행복을 더 이상 저울질하지 않게 되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조화롭게 이어갈 수 있을지를 묻는 문제라는 쪽에 더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가족을 믿는다. 다만 이제는 가족을 위해 나를 지우는 대신 나를 지키며 가족 곁에 서고 싶다.
지금의 나는 삶의 중심에 이 말을 두고 싶다.
천천히, 그리고 다정하게.
천천히 산다는 것은 결정을 미루겠다는 뜻이 아니라 내 마음을 앞질러 가지 않겠다는 약속이고, 다정하게 산다는 것은 나와 타인을 조금 덜 몰아붙이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생각할 시간을 갖고,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마음을 살피며, 행동하기 전에 이 선택이 나를 소모시키지는 않는지 묻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올해의 원워드를 가슴에 새긴 채로 소리 내 본다.
자문자답을 하며 내가 배운 것은, 답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질문의 방향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를 다그치는 질문이 아니라 나를 살게 하는 질문을 던질 때, 삶은 비로소 숨을 고른다.
이 연재를 쓰는 동안 기쁜 일도 많았고, 그보다 더 감사한 일이 많았다. 읽어주신 마음, 함께 머물러주신 시간, 말없이 건네주신 공감 덕분에 이 질문들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자문자답은 여기서 잠시 멈추지만, 나에게 묻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안부를 건넨다. 거창한 응원도, 분명한 해답도 아닌 그저 한 문장.
"○○야, 별일 없지?"
누군가에게는 그 안부 하나가 오늘을 살아내게 하는 힘이 되고, 내일로 한 발 더 나아가게 하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어른의 행복은 그렇게 조용히 오고, 아무 일 없는 하루처럼 천천히 스며든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오늘, 그런 안부 하나가 조용히 닿기를 바란다.
그동안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